가톨릭 유일의 시각장애인 합창단 ‘에파타 시각장애인 합창단’(단장 김성숙, 지휘 유인곤)에게 음악은 아기 예수다. 앞을 볼 수 없지만 빛을 주었고, 절망에서 희망을 보여줬다. 음악은 그들을 구원했다. 음계 하나 모르고 시작한지 24년, 에파타 시각장애인 합창단이 성탄을 앞두고 지난 16일 오후 7시30분 서울 논현동성당에서 제1회 정기연주회를 열었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준비한 그들의 첫 음악회 여정을 함께한다.
■ 마음의 노래
가만히 눈을 감는다. 송창식의 ‘사랑이야’를 부르는 에파타 시각장애인 합창단원들의 음악소리가 성전을 채웠다. 청중들 마음까지도 음악소리로 꽉 찼다. 청중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시각장애인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었다. 눈물은 감동의 산물이었다. 합창단의 목소리는 그 자체가 감동이었다.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부르는 에파타 합창단의 노래가 시작된 것은 지난 1987년이다. 한 신부의 이임식에서 특송을 부르기 위해 구성됐다. 그들은 그렇게 험난한 음악 여정의 첫 발을 뗐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해체되는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10여 년 전 재결성했다. 서울대교구 시각장애인성당 산하의 합창단은 지휘자를 제외한 모든 단원이 시각장애인이다.
음악을 배운 경험이 없었던 단원들이 지금처럼 천상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 아니다.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다. 지휘자가 파트별로 노래를 녹음해 테이프, CD, 음악파일 등으로 전송하면, 2주간 듣고 또 들으며 각자 연습한다.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소리에만 의존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뿐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서울 개포동에 위치한 시작장애인성당에 모이는 주일이 모든 단원이 함께 연습하는 시간이다. 노래를 위해서라면 경기도 김포에서라도 달려온다. 연습시간은 길지 않다. 평소에는 2시간30분 정도지만, 연주회를 앞두고는 연습시간을 배로 늘렸다. 연주회 당일에도 오후 2시부터 리허설을 시작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온몸의 신경을 귀에 집중시켜야 했다. 지휘자의 지도와 타 단원의 음색을 고루 살펴야 했다.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많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이자 ‘빛’인 노래를 마음속 깊이 새겨 넣었다.
▲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간절함으로 첫 음악회를 연 에파타 시각장애인 합창단.
■ 귀와 손의 노래
연주회가 시작되고, 단원들은 청중 앞에 섰다. 단원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1부 첫 곡 ‘빛으로 나신(O Nata LUX)’이 시작됐다. 동시에 그들의 귀와 손도 바빠졌다. 귀는 단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손은 점자 악보를 따라갔다. 음을 하나라도 놓치면 바로 실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음악에 대해서는 모든 걸 알려주는 지휘자도 연주회 때만큼은 함께 노래하는 것 외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손과 귀만이 연주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합창단은 이날 무려 18곡을 연주했다. 기억에 의존해 노래를 불러야 하는 단원들에게 18곡은 너무나 많은 곡이다. 게다가 레퍼토리도 어려운 곡들로 구성돼 있었다. 특히 테리 슐렌커의 ‘알렐루야’는 비장애인 합창단마저 꺼려할 정도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쉬운 노래를 부르고 동정심 깃든 박수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화음을 내기 위해서는 손과 귀도 그만큼 역할을 해야 했다. 리허설을 하면서도 충분히 의견을 나눴다. 피아노 반주도 더 경청했다. 단원들의 온전한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첫 음악회를 향한 열의는 감동의 노래를 청중에게 선사할 수 있게 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동의 음악을 들려준 그들의 목소리, 손과 귀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박수였다. 청중들의 박수 소리에 단원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들의 손과 귀도 웃는다.
▲ 에파타 시각장애인 합창단의 노래는 귀와 손, 마음이 부르는 노래다.
■ 어둠의 노래
연주회 4부의 시작과 함께 성당의 모든 불이 꺼졌다. 눈을 감지 않아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마치 그들의 목소리만 남은 듯했다. 그 어떤 연주회에서도 할 수 없는 값진 체험이었다.
모두가 동등한 어둠 속에서도 단원들의 손과 귀는 멈추질 않았다. 그레고리오 성가부터 헨델의 ‘알렐루야’까지 멋지게 선보였다. ‘열려라’라는 ‘에파타’의 뜻대로 청중의 마음과 귀를 열었다. 합창단의 가치를 보여주고 싶다던 지휘자와 단원들 바람이 이뤄진 것이다. 음악회가 끝나자 단원들은 기쁨을 만끽했다. 음악회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기간만 3년을 들였던 그들에게 음악회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어둠이 눈앞을 가려도 ‘빛’을 찾아내는 합창단은 이제 못할 것이 없다. ‘직업합창단’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날개를 활짝 편 것이다. 이번 음악회에서 합창단은 후원회원을 모집하기도 했다. 그동안 단원들이 사비를 들여 가난하게 운영해 왔지만 전문 합창단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2대와 현재 지휘를 맡고 있는 유인곤(요셉)씨는 “우리는 빛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며 “장애인으로 동정을 받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가치로’ 승부하기 위해 전문합창단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며, 모든 이의 희망과 등불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후원문의 1005-401-821301 우리은행 ((재)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