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지역 내 모든 신자들의 손길 안에서 완성된 성당은 이후 신앙뿐 아니라 지역 사회·문화의 구심점으로 든든한 품을 내주고 있다. 특히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을 실현하는 기도와 여론도 이곳 성당에서 확산돼 나갔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성당은 지난 2004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번 호에서는 강원도 원주 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뿌리내려온 원주교구 원동주교좌본당(주임 남궁민 신부)의 면면을 살펴본다.
1965년 원주교구가 설정되면서 주교좌가 마련된 성당이다. 곧바로 이듬해에는 교구 설정 이후 첫 사제서품식이 거행되면서 성당은 교구 역사의 뿌리를 감싸 안았다. 1955년 다시 봉헌된 새 성당은 정면 중앙 종탑의 장방형 건물로 폭에 비해 길이가 매우 긴 골롬반회 관할 성당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외벽 처리는 석조와 같은 느낌, 특히 중앙 종탑 꼭대기에는 돔을 얹어 횡성성당과 더불어 1950년대 원주 지역 성당의 상징이 됐다.
시간을 거슬러 1896년. 교구 최초의 본당인 풍수원본당에서 분리, 신설된 이 본당은 처음에 원주본당으로 불렸다. 당시 풍수원과 부엉골에 이어 세 번째 본당으로 탄생했지만, 이후 부엉골이 공소로 격하되면서 실질적인 두 번째 본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본당은 설립 당시 20개 공소를 관할했지만 이후 꾸준히 분할, 양평과 학성동, 단구동본당 등 원주시내 본당만도 7개나 연이어 분가시켰다.
강원도 지역에는 신유박해를 전후로 복음이 전파된 바 있다. 특히 병인박해 때는 강원도에 숨어살며 교우촌을 이뤘던 신자들이 다수 순교하기도 했다. 블랑 주교는 이러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박해를 피하기 좋은 곳으로 강원도 원주군 부엉골을 선정, 1885년 이곳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세우고 페낭 유학생을 포함한 신학생들이 이곳에서 학업을 이어나가도록 했다. 하지만 이듬해 한불조약이 체결되자 신학교를 서울 용산으로 옮기게 됐고, 본당 사목은 등락을 거듭하다 결국 활동을 접는 방향으로 마무리됐다.
일제 치하, 강원도 지역 신자는 물론 일반인들의 큰 아픔 중 하나가 배움의 길을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본당은 성당을 짓기도 전인 1910년부터 20여 년간 야학을 운영, 지역사회 문맹퇴치의 일등공신이 됐다. 1930년에는 야학을 폐지하고 보통학교인 ‘소학학원’을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문을 연 소화학원 유치원반은 현재까지 소화유치원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 성당 내부 유리화.
원동본당을 소개할 때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간존엄성을 수호한 중심 역할이다. 1971년 10월 5~7일 성당에서 열린 교구의 부정부패 규탄대회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새로운 쇄신의 모습을 드러낸 장이었다. 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교회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원동성당은 교구 사회정의운동의 중심으로 더욱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나아가 유신정권 아래서 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한국교회의 정의구현운동이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도 큰 지지기반이 됐다.
115년여 역사의 굴곡 안에서 원동본당은 강원도뿐 아니라 경기도, 충청북도 일부 지역 신앙의 주춧돌로 단단한 모습을 유지해왔다. 산골에 세워진 작은 본당에서 뻗어나간 복음말씀은 여전히 지역사회 복음화의 겨자씨로 자라나고 있다. 또한 지난 역사의 의미는 오늘의 공동체가 더욱 알찬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 원동성당 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