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신앙을 접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한 그는 관청에 있던 자신의 자리를 이용해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인물이다.
박상근은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들은 물론 이웃에게 열심히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했다. 비신자 어린이들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으로 급히 달려가 대세를 주기도 했다.
▲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묘.
3일 후 그는 칼레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만 했는데, 이때 칼레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른 뒤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신부가 박상근을 돌려보내려고 한 것은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인데 그는 울면서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제가 신부님 곁을 떠나다니요. 혹시 한실이 습격을 당했다면 신부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렵니까? 은신하실 곳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신부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기꺼이 따라 죽겠습니다.”
하지만 칼레 신부의 명에 순종해 집으로 돌아온 박상근은 얼마 되지 않아 숙모 홍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돼 상주로 끌려갔다. 그는 옥중에서도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많은 교우들에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권면했고, 많은 교우들은 여기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됐다고 전한다.
1867년 1월, 박상근은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30세였다. 순교 직전 그는 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