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빛이 생겨나기 전, 아직 태양이 뜨기 전, 어두운 밤바다 앞에 서서 2012년을 맞을 준비를 한다. 시작이자 끝이요, 끝이자 시작인 무한의 바다 위로 떠오를 2012년의 태양, 2012년의 희망을 만나기 위해 찾은 동해 물치항. 그곳엔 평생 ‘주님’이란 등대를 의지하며 살아온 ‘희망을 낚는 어부’ 이상율(유스티노·58)씨와 그의 아내 이명희(유스티나·58)씨가 있었다.
#장면 하나 - 새벽 4시, 부둣가, 보이지 않는 희망
새벽 4시. 어둡다. 춥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40년 동안 뱃사람으로 살아온 이상율씨의 하루는 해뜨기 전 시작된다. 성큼성큼 어둠을 가르며 걷는 이씨를 뒤따라온 차가운 칼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내리쳐도 이씨의 발걸음은 흔들리는 법이 없다.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고깃배 위로 오른다. 선장실 창문 앞에 걸린 오래된 나무 묵주도 철썩이는 파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
“파도가 너무 센데….”
덤덤한 목소리의 이씨는 말수가 적다. 대신 부드럽게 주름진 이씨의 얼굴이 그동안의 수많은 이야기를 대신 전해준다.
뱃사람 이상율씨는 열여덟 살 때부터 바다에 나갔다. 밑으로 세 명의 남동생,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꿈을 갖기엔 너무 가난했던 그 시절, 이씨는 동생들의 꿈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동생들을 빛으로 나가게 하기 위해 자신은 어둔 바다 위를 택했다. 바다는 이씨에게 작은 희망을 끊임없이 날랐다. 이씨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기다리고, 그리고 주시는 것을 그대로 거두어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12년, 동생들의 뒷바라지가 끝나갈 무렵 이씨는 스물아홉 느지막한 나이에 동갑내기 아내 이명희씨를 만났다.
#장면 둘 - 같은 시각, 인정이네, 서로 사랑하여라
밤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남편 상율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내 명희씨가 하루 장사 준비에 나선다. 부부의 삶이자 희망인 큰딸의 이름을 따 차린 횟집 ‘인정이네’. 아직 손님이 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아내 명희씨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부부의 연을 맺은 지 30년째. 이제 ‘사랑’이라는 말이 남사스럽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아궁이 불처럼 뜨뜻하고 깊은 서로에 대한 사랑은 속일 수가 없다.
매일 새벽 4시면 어둔 밤바다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수없이 봐 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다로 나서는 남편을 따라 명희씨도 바다로 나왔다. 물치항에서 대포항까지 종종걸음으로 30분은 족히 걸리는 그 길을 남편에게 뜨끈한 밥을 먹일 생각으로 매일 도시락을 들고 걸었다. 눈이 허리까지 차고 손발이 꽁꽁 어는 추위도 사랑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명희씨가 가게 불을 켠다. 물치항이 바라보이는 창문 위로 예수님의 얼굴이 걸려있다.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예수님 얼굴 옆으로 나무에 새겨진 성경 한 구절이 가슴에 꽂힌다.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또 있을까.
#장면 셋 - 새벽 6시, 다시 부둣가, 파랑주의보
새벽 6시. 동이 트려는 듯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하늘과 맞닿은 바다도 붉게 꿈틀거린다. 새 아침을 열기 전 하늘과 바다의 역동(力動).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직 하늘엔 별도 달도 떠 있다. 해가 떠오르면 곧 눈앞에서 사라질 빛이지만 애초에 별도 달도 그 자신의 자리에 있었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별과 달이 떠 있는 새벽 바다 위, 배는 아직 항구를 떠나지 못한다. 기상청은 파랑주의보를 해제했지만 파도는 아직 바다를 놓아주지 않는다. 배가 뜨지 못하면 어쩌나, 기자는 발을 동동 구르는데 상율씨는 오히려 무덤덤하다. 물고기를 잡지 못하면 오늘 장사는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상율씨는 말없이 웃는다.
“내일이 있잖아요. 물고기는 내일 잡으면 되지….”
맞는 말이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그리고 물고기는 내일 잡아도 된다. 오늘 하루 배가 뜨지 않는다고 해서, 오늘 하루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 걱정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수십 번 강조하셨다. 상율씨도 파랑주의보 앞에서도 그저 웃는다.
#장면 넷 - 회상, 믿음의 뱃길 40년
그렇게 걱정 없이 두려움 없이 40년을 뱃사람으로 살았다. 상율씨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해주신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없던 제가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는 것만으로 동생 다섯을 공부시키고, 부모를 부양하고, 자녀 셋을 낳아 대학 공부까지 시켰어요. 욕심 부리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데로만 갔어요.”
어떤 날은 물고기가 많이 잡히고, 어떤 날은 낭패를 봤다. 또 어떤 날은 잔잔한 파도를 타고 먼 바다까지 나갔고, 또 어떤 날은 파도가 높아 며칠 동안 배를 띄우지 못한 적도 있었다. 40년 뱃일을 하며 죽을 고비도 두 번이나 넘겼다.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대화태 어장에 나갔던 열여덟 살때 큰 파도가 배를 덮쳐 죽을 고비를 넘겼고, 스물여섯 무렵에도 배가 뒤집어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쯤 되면 두려워할 만도 한데 상율씨는 여전히 무덤덤하다. 40년 동안 자신을 지켜준 주님에 대한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다 알아서 해 주시는데요 뭘….”
그 한마디로 상율씨 가족이 타고 온 믿음의 배가 얼마나 크고 튼튼한지 짐작이 갔다.
#장면 다섯 - 아침 7시39분, 일출, 희망을 낚는 항구
아침 7시39분, 일출이 시작됐다. 바다 위로 하얀 구름이 몰려들더니 구름 위로 황금빛 실선이 나타났다. 해의 머리다. 조금 더 기다리니 구름 사이로 눈부신 해의 얼굴이 드러난다. 형용할 수 없는 색과 빛. ‘태초’를 생각하게 하는 빛,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의 빛. 벅찬 감격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답고 빛나는 보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부식된 바닥 위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오래된 그물도, 군불을 쬐며 언 몸을 녹이는 어부들의 낡은 옷자락도, 녹슨 삽과 다리 한쪽이 부러진 나무 의자도 모두 눈부시게 빛난다. 세상 그 어느 보석보다 아름다운 주님의 소유물이다.
일출이 끝났다. 태양이 지구가 태어난 46억년 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저 바다 위를 떠올랐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약속’이다. 단 한순간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주님의 사랑의 약속.
#장면 여섯 - 오전 9시, 야훼이레
파도는 잦아들지 않았고, 결국 배는 뜨지 못했다. 바다 위 일출 장관을 배경으로 군불을 쬐며 살아가는 이야기, 어젯밤 뉴스 이야기 자식 이야기, 일상을 나누던 어부들도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배가 뜨지 못했다고 해서 절망하거나 실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내일을 기다리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보지 않아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보이지 않아도 기다릴 줄 아는 것이 희망이다.
오전 9시. 상율씨도 돌아갈 채비를 한다. 항구를 뜨지 못한 상율씨 배 앞에는 어제 잡아둔 물고기가 가득하다. 상율씨가 물고기를 상자에 담고 있을 때, 어디에선가 나타난 손님 하나가 그 물고기를 사겠다고 한다. 족히 30kg은 돼 보이는 물고기 한 상자가 3만원이라는 헐값에 팔려나간다. 욕심을 버리면 행복하다. 상율씨는 빳빳한 만원짜리 세 장을 주머니에 넣으며 싱글벙글 웃는다. 하늘 위 태양이 집으로 돌아가는 상율씨의 뒤를 따뜻하게 비춘다.
야훼이레. 주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신다.
▲ 이상율씨가 잡은 물고기.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만 따라 가는 상율씨는 파랑주의보가 내리기 전 그물이 넘치도록 많은 양의 물고기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