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뒤늦은 나이 59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이 있다. 하느님의 종 124위에 꼽힌 이정식(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됐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환갑에 다다른 나이에 천주교 교리를 접하고 나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가족들 또한 열심히 권면해 입교시켰으며,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음식을 먹었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했다.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 때문에 이정식은 입교한 지 얼마 안 돼 회장으로 임명됐고, 그 직분을 다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했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해 교우들과 생활하며 신앙을 지켰다.
하지만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 가운데 회장인 그의 이름이 밝혀지자 관아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에 추적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했는데, 이정식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과 조카 이삼근(베드로)은 이정식이 체포됐다는 소리를 듣고 자수했다.
비록 포졸들에게 체포돼 압송됐지만 이정식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마르티노)을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했다. 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모두에게 밝히고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했는데, 그 교우들이 사는 곳만큼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엄청난 고초를 겪은 이정식은 동료들과 함께 서로의 신앙을 지켜가며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하나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지 않도록 하였다. 1866년 여름, 그의 나이 74세에 이정식은 하느님의 종 124위에 속한 그의 대자 양재현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순교하기 전 그는 삼종기도를 바치고 십자성호를 그은 다음 칼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둬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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