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김대건 성인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그를 기억하고 기도하고 있지만 남쪽의 섬나라, 필리핀의 발자취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필리핀 불라칸(Bulacan)지역의 롤롬보이(Lolomboy). 그곳에 남아있는 김대건 성인의 흔적을 찾아가봤다.
▧ 한글로 적힌 표지판 눈에 들어와
마닐라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약 1시간 30분, 거기서 또다시 30분가량을 필리핀 특유의 교통수단 지프니(Jeepney)로 달렸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작은 마을 롤롬보이. 지프니에서 내려 매캐한 매연을 헤치고 주변을 보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낯설다. 고온다습한 날씨도, 건물들도, 사람들의 모습도, 심지어는 풀포기에 이르기까지 달랐다. 지금이야 그나마 포장도로나 콘크리트 건물들이 늘어서 그나마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지만 170여년 전 열일곱의 어린 신학생 김대건이 이 땅을 밟았을 당시에는 조국의 모습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별세계였을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알파벳으로 가득한 이 이방의 땅에 한글로 또박또박 적힌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들어서자 김대건 성인의 늠름한 동상이 반기고 맞은편에는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당장이라도 복음을 선포하러 갈 듯 지팡이를 짚고 있다.
김대건 성인이 이곳 필리핀에 처음 온 것은 1837년 8월. 서울에서 순명과 봉사를 서약하고 6개월간의 험난한 여정을 거쳐 마카오에 도착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이 공부를 시작한 지 불과 두달 만이었다. 신학생들은 당시 아편문제로 혼란에 빠진 마카오를 피해 필리핀의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1839년 4월 다시 민란을 피해왔고 1842년 2월 대만으로 가기 전 10여 일을 머물기도 해 김대건 성인이 이곳에서 생활한 기간만 1년 이상이다. 현재 김대건 성인의 성지가 조성된 곳이 바로 도미니코수도원 터다.
▲ 김대건 성인은 이곳 롤롬보이를 3차례 방문하고 1년 이상을 공부하며 생활했다.
▧ 롤롬보이 주민들도 성인에 큰 관심 가져
김대건 성인 동상 뒤편으로는 성인의 유해소와 기와지붕의 경당이 있고 경당 옆에는 커다란 망고나무가 서있다. 도미니코수도회의 기록에 따르면 지금은 ‘망향의 망고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 곁에서 김대건 성인이 부친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망고나무를 뒤로하고 길을 따라가면 7궁방탑이 보인다. 관상의 7단계를 상징하며 김대건 성인이 온갖 역경을 딛고 공부하던 과정을 기억하게 하는 이 탑은 근방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로 탑 7층에 올라가면 롤롬보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 탑에는 각 층별로 작은 방을 마련해 기도와 피정 등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 롤롬보이본당의 김대건 성인상의 모습, 성지조성으로 롤롬보이본당은 김대건 성인을 본당주보성인으로 삼고 성인의 축일에는 마을 전체가 성대하게 축제를 벌이며 기쁨을 나눈다.
▲ 기와를 활용,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경당과 7궁방탑의 모습.
▲ 유해소 외부 모습.
▲ 유해소에 안치된 김대건 성인의 유해 모습.
▧ 후원금 부족으로 성지 건축 진행 힘들어
성안드레아수녀회는 약 10년간 후원금이 마련될 때마다 성지를 가꿔 지금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조성했지만 후원금의 부족으로 진척이 안 돼 아직도 성지의 중심이 될 성당과 봉헌소 등의 건축이 진행 중이다. 특히 김대건 성인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갓’을 형상화해 8층 높이의 건물로 건축 중인 성당은 호숫가에 지어져 성지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해줄 것으로 기대되지만 자금 부족으로 건축이 중단된 채 방치되기도 했다. 또 피정의 집도 있어 30여 명이 숙식할 수 있지만 방문객이 거의 없다고 한다.
▲ ‘갓’을 형상화한 성당(좌측)과 봉헌소(우측)의 건축이 진행되고 있다. 자금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등 완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성지에 마련된 피정의 집은 30여 명이 숙식할 수 있지만 찾는 방문객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피정의 집 모습.
※순례문의 031-673-8560 성안드레아수녀회, 후원계좌 310-08-225166 우리은행 (예금주 김화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