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히 잠자던 어린 사무엘이 그분의 음성에 화들짝 깨어나 세 번이나 냅다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애처롭습니다. 그런데 젖을 뗀 후 곧바로 하느님께 바쳐졌던 나지르인이며 “어린 나이에 아마포 에폿을 두르고” “주님 앞에서 자라났다”는 사무엘이 ‘아직’ 주님을 알지 못했다는 게 의아합니다(1사무 2장 참조). 오늘 독서가 “소년 사무엘”의 잠자리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 있었다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분을 ‘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 고민됩니다.
흔히 그분의 세례를 받은 후에도 “하느님을 모르겠다”하는 일, 성당은 나가지만 “구원의 확신은 없다”는 우리 모습은 아닐지, 하느님의 말씀이 옳고 좋지만 “어떻게 그 말씀대로 살아 갈 수 있느냐?”고 딴전을 부리는 우리 모습은 아닐까 짚어봅니다. 그분의 자녀임에도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비극적인 상태의 우리를 일깨우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미사에서 그분의 음성을 빤히 듣고서도 세상 품에 폴싹 안기는 우리를 향한 질책으로 들립니다. 그분 사랑을 피상적인 것으로 폄하시켜 그분의 희생과 아픔과 사랑에 무감각한 우리를 향한 그분의 호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어버이들에게 자녀를 맡기시며 그분을 제대로 알고 깨닫도록 가르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며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자녀에게 세상의 것만 가르친다면 “그분의 총애”를 잃게 할 것이라는 매서운 경고로 읽습니다.
이때문에 오늘 독서에서 생략된 부분이 마음에 거치적댑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식의 패악한 행위 탓에 하느님께 혼쭐이 난 사실을 무심히 흘리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엘리의 죄악이 “자기 아들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책망하지 않은 것”이라고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2,30)라고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이런 주님 앞에서 유구무언이던 엘리의 딱한 처지를 충분히 감안하여 모든 어버이의 영혼이 깨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기막힌 현답을 가르친 사람입니다. 그는 남에게 주님의 길을 알려주고 가르쳤으며 나름 충실하게 제사장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백성과 관련된 사제들의 규정도 무시”(2,12-13)하는 아들들에게 “내 아들아 안 된다!”며 나서서 말린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식들은 안하무인으로 지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제사장직을 맡은 사제라는 걸 생각하면 딱할 뿐입니다. 이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자녀가 엇가는 줄 뻔히 알면서도 책망하지 않은 아버지 엘리의 죄를 “제물이나 예물로는 영원히 속죄받지 못하리라”고 단언하십니다. 따져보면 그들의 불량함은 그들의 몫일 수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타고난 드센 성정이, ‘오냐오냐’ 하던 환경이 그들을 불량하게 만들었을 수 있음에도 그렇습니다. 한 가지 찜찜한 것은 사무엘이 하느님의 환시를 보았을 때 그 말씀을 “한마디라도 숨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라며 똑부러지게 잘라 말했던 그가 “아버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2,25) ‘아들’에게는 한없이 허약하고 나약했다는 점입니다(2,17 참조). 이야말로 자신의 피붙이 신앙교육에 소홀하여 모든 걸 수용하고 모른 척 덮어주는 무조건적인 관용에 대한 따가운 경고라 믿습니다.
자녀들에게 그분을 알려주고 일깨우는 신앙교육을 하고 계신지요? 자녀에게 주님을 알도록 가르치고 계신지요? “하늘이 자식을 내려준 것은 세상에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지만 그분께는 그 의미가 통하지 않는 듯합니다. 내 자녀가 그분을 모르고 그분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걸 알면서도 ‘그만하면 됐다’고 방임하는 일도 “세례 받았으니 됐다”며 그들을 영적 어린 아이로 방치시키는 행위도 모두 그분의 소명에 대한 직무유기임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새해, 온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들이 부모님 성화에 못 견뎌서 성전으로 몰려오기를 기대합니다. 모두 그분을 ‘알게’ 되기를 꿈꿉니다.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콜로 1,10) 키우는 일, 정말 중요하고 귀한 최고의 소명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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