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행선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생가성당’
인천공항에서 출발한지 12시간 만에 경유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다다랐다. 반나절을 비행기 안에서 보냈더니 온몸이 뻐근하고 정신도 몽롱했다. 비행기에서 벗어났다는 기쁨도 잠시, 최종목적지인 포르투갈까지 가려면 두 시간의 비행이 더 남아 있었다. 현지시각으로 오후 11시를 훌쩍 넘겨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 숙소로 이동하면서 바라본 포르투갈은 그저 생소하기만 했다.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곳에서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튿날 이른 아침, 일정은 바로 시작됐다. 첫 번째 행선지는 설교자의 주보성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생가성당’이었다. 성당 마당에서 안토니오 성인의 동상이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많은 기적을 행한 성인답게 동상 밑에는 그가 이룬 기적이 기록돼 있었다.
소박한 외형과는 달리 성당 내부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안토니오 성인 생가터는 성당 지하에 위치해 있다. 1755년 대지진으로 무너졌던 것을 복원했다. 이곳에는 안토니오 성인이 탄생한 자리를 기념하는 제대가 있다.
▲ 설교자의 성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생가성당’에서 순례단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이곳에서 순례자로서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움을 찾아나서고자 결심했다.
이곳에서 순례의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익숙함을 버리고 낯선 것을 찾아 나서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고 새로움을 찾아가야 한다”는 순례단 지도사제 김정우 신부(대구대교구 대신학원 원장)의 강론이 가슴 깊은 곳을 쳤다. ‘잃어버린 물건에 미련을 갖기보다는 이번 순례에서는 새로움을 찾아야 나서야 겠다’는 결심이 섰다.
성 안토니오 생가성당 바로 뒤편에는 리스본주교좌성당인 라세대성당이 있다.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리스본을 폐허로 만들었던 대지진도 견딘 견고한 건물이다. 성당은 지속적인 보수와 증축으로 고딕,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을 지닌 건축박물관이라는 별칭까지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짧은 방문을 마치고 리스본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 중 하나인 ‘예로니모 수도원 성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예로니모 수도원 성당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예로니모 수도원 성당은 성 안토니오 생가성당과 달리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성당 앞에는 임페리오 공원도 마련돼 있어 많은 리스본 시민과 순례객들이 이곳을 찾아온다. 1502년 세워지기 시작해 26년 만에 완공된 예로니모 수도원 성당은 포르투갈 건축양식인 ‘마누엘 양식’의 걸작이라고 일컬어진다. 당시 포르투갈 왕이던 마누엘에 의해 창건된 이 건축양식은 고딕양식에 비해 단조롭다. 1500년 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지만 건축분야에서는 포르투갈이 마누엘 양식을 통해 르네상스를 이끈다. 성당 내부는 웅장한 규모 외에도 섬세한 장식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항해를 통해 강대국으로 성장한 국가답게 건축물 중간에 띳장은 배에서 쓰는 닻줄 모양으로 표현했다. 또한 어개류(魚介類)나 해초 등에서 모티브를 얻은 풍부한 장식도 눈에 띄었다.
▲ 고딕양식에 비해 단조롭지만 아름다운 마누엘 양식으로 건축된 예로니모 수도원 성당.
성당은 르네상스시기에 건축됐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는 동쪽에, 입구는 서쪽에 위치해야한다는 유럽교회 건축 원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서쪽으로 난 입구에 들어서자 양쪽에 놓인 관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왼쪽에 있는 관은 포르투갈의 운명을 바꾼 항해사 바마스 다 가마의 유해가 위치하고 있었다. 바마스 다 가마는 148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희망봉을 발견하고, 10년 뒤에는 인도의 고야를 찾아냈다. 그는 인도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된 이후 초대 총독으로 임명됐으나 풍토병으로 사망했다. 오른쪽에 있는 관의 주인공인 언어학자의 까모이스는 포르투갈의 세종대왕과 같은 인물이다. 까모이스가 없었다면 현재의 포르투갈어가 존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자 성당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주어졌다. 고딕양식에 비해 단조롭다지만 역시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당을 바라보면서 당시 종교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수많은 순례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며 유럽교회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포르투갈의 운명을 바꾼 항해사 바마스 다 가마의 유해가 성당 입구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 포르투갈교회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포르투갈 하면 떠오르는 곳은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파티마’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포르투갈이 아시아교회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1500년대 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포르투갈은 인도 고야를 최초의 식민지국가로 삼고 세력을 넓혀간다.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공부했던 마카오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특히 15~17세기 영역을 확장하면서 많은 수도회가 아시아 선교에 집중했다.
▲ 예로니모 수도원 회랑에 설치된 배의 닻을 상징하는 조형물. 포르투갈교회는 15~17세기 항해술의 발달과 더불어 남미와 아시아 지역에 가톨릭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대서양과 지중해에 둘러싸여 있는 포르투갈은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가톨릭교회가 뿌리 내린 포르투갈은 이슬람의 지배가 몇 백 년 동안 지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끝까지 사수했다. 포르투갈 교회는 수도회가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수도회와 시토회 등이 이 지역에서 성장했으며, 15세기 이후에는 브라질 등 남미 선교에도 큰 영향을 줬다. 또한 항해술 발전으로 새로운 해안선 발견을 하면서 나라의 부흥을 이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