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민(재미 언론인·필라델피아 한글문화연구원장·전 경향신문 부사장)
“70년간 한 점 부끄럼없이 정정당당하게 불의에 항거하고 싸우지 못한 허물은 없었는지 자성의 기회로 삼았으면…”
우리는 일흔 살 생일을 맞은 노인에게 고희 잔치를 베풀고 있다. 평균 수명이 고작 3, 40 밖에 안 되던 시절에 일흔 살까지 살기란 그야말로 보기 드문 희귀한 존재로 그야말로 고희의 대접을 받을 만 하였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75세가 넘고 보니 나이 70이란 고래희가 아닌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가톨릭신문 창간 70돌이란 그야말로 고래희란 생각이 든다. 창간 당시의 우리나라 형편이 어떠한 때인가를 생각할 때 참으로 신문이 태어나기에는 너무나 힘겹고 어렵기만 한 흉흉한 분위기에 휩싸인 시련과 고난의 시대였다. 1927년 4월 1일 남방(대구교구) 천주교 청년회 기관지로 이 세상에 태어난 가톨릭신문은 일흔 해 동안의 나이테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오늘 보는 바와 같은 의젓한 가톨릭 언론의 거목으로 자랐다. 우선 가톨릭신문의 장한 일흔 해의 발자취에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1919년 3·1 독립운동으로 침략자의 간담을 서늘케 한 한민족의 함성에 놀란 일본은 해군 대장 사또를 조선 총독으로 임명하고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것을 표방하면서 20년대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의 조선신문의 발행을 허가하는 유화책을 썼다. 이 같은 그들의 선심은 가면일뿐 실제로는 이전보다도 더욱 철두철미한 식민지 정책을 노골화시켰다. 문화정치를 한답시고 한글판 신문들을 허가는 해 주고는 곧 이어 치안 유지법(25년)을 만들어 마구잡이로 언론의 필화를 일삼고 다스렸다. 신문 압수, 언론인 구속, 신문 정간 폐간 등을 자의로 하면서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교의 한국 언론계의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러한 때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대구교구의 천주 교회보는 태어났다. 처음 월간으로 출발한 규모가 작은 지방의 청년회 기관지이긴 했지만 신문 체제의 구심점만은 발행 목적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첫째, 소식 보도, 둘째로는 의견 교환, 셋째는 보조 일치라고 했다.
가시밭길을 헤매면서도 나라와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발행 목적을 통해 달성시키고 있었다.
이 신문의 특색으로는 다른 신문과는 달리 돈 많은 자본가가 중추가 된 것도 아니고 민족운동의 이름 있는 고명한 지도자가 나서서 만든 신문이 아니라 가톨릭 평신도 젊은이들이 똘똘 뭉쳐 신문을 해낸 점이라 하겠다. 평신도들이 주동이 되어 편집하고 신문 간행한 그 엄청난 교회 사랑과 나라 사랑의 정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살아 남기 힘든 가시밭 세월에서도 견디어 나고 버티어 나간 이 신문은 6년 만인 33년 4월 1일에 뜻하지 않게 폐간을 하게 된다.
폐간사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 것은 일제의 총칼에 의한 탄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어이 없게도 교회 내의 교도권적인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5개 교구의 주교들이 내린 교서에 의해 하루 아침에 숨을 거둔 것이다. 한 마디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할 경황도 없이 주교회의 결정으로 모처럼 평신도들이 키운 신문은 폐간이 되었다.
주교회의에선 나름대로의 가톨릭 액션을 위한 초교구적인 출판물에 관한 전략에 따라 5개 교구 공동 출판부를 설치하여 공동 보조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충분한 이유가 있긴 했지만 모처럼 자란 가톨릭 언론의 싹이 내부적인 교도권의 지시로 싹뚝 잘린 것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서울 교구장이었던 라리보(원) 주교는 나중에 출판부 위원장의 이름으로 폐간된 신문에 대해 여러 해 동안의 공적에 대해 치하를 하고 가톨릭 액션을 교구별로 분산시키지 말고 종합적으로 공동 대처하기 위해『혼연히 희생한 데 대해』고맙게 생각한다는 뜻을 표명하기는 했지만….어쨌던 결과적으로 서울에서 발행하게 된「가톨릭 청년」잡지를 위해 희생된 꼴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는 폐간한 지 16년 만인 해방 후인 49년에 이르러서야 긴 잠에서 깨어났다. 속간의 비통을 이어 받은 주동 멤버들도 창간 때와 같이 대구교구 청년회의 간부들이었다. 50년도에는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을 겪으면서 한 때 휴간도 했으나 평신도에 의해 운영되던 이 신문은 결국 정식으로 천주교회 대구교구로 운영권이 넘어가 든든한 교회 조직의 힘으로 도약의 길을 걸어 한국 천주교회의 간판 신문이 되었다. 날이 갈수록 월간은 월 2회로 마침내는 주 1회로 증간 발행으로 정착되었다. 이름도 천주교 회보에서 가톨릭신보로 또 가톨릭시보로 그리고 가톨릭신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렇게 발전하는 가운데 신문의 체제도 신문으로서의 각종 기능을 발휘하면서 교회 안의 소식 전달지로서의 보도 기능은 물론 논평의 기능, 심지어는 만화까지 곁들인 오락의 기능도 발휘하면서 신문의 구색을 골고루 갖추며 가톨릭 언론으로서의 우람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오랜 독자로서 가톨릭신문에 대한 나의 솔직한 인상은 이렇다.
이단적인 싸움에서 항상 호교적인 방패 구실을 해 왔다. 복음 선포의 나팔수 역할을 맡기도 하고, 사회 정의를 주님의 이름으로 밝히는 등대수 노릇도 했다. 신자들의 의견, 주장을 수렴하는 신문고 역할도 수행했고 때로는 교회 공동체의 비리와 문제점을 파헤쳐 올바른 교회 상을 제시하며 정화수 구실도 했다. 사회 정의에 반하는 국정에 대해서는 과감한 비판의 필봉을 휘두르기도 하는 용맹과 패기도 보였다.
그러나 70년 동안의 발자취 속에서「가톨릭 언론의 얼굴」에 한 점 부끄럼없이 정정당당하게 불의에 항거하고 싸우지 못한 허물은 없었는지는 자성해 볼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기록에 보면 일제 때인 1929년 한 해 동안에 언론 출판계의 수난은 엄청났다. 신문 차압이 63회, 기사 삭제 82회, 출판물의 압수가 57종이나 되었는데 당시의 가톨릭신문은 이에 해당되지 않게 지혜롭게 탄압의 칼날을 피한 것인지 아니면 가톨릭 당국 앞에 순명했듯 양순한, 길들여진 양 같은 무력함이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의 공동체 운영을 위한 대담한 비전을 제시하고 각 교구별로 나타나는 각종 사업이나 행사에 바람직하지 못한 경쟁이나 이해에 얽힌 일에 관해서는 과감하게 신문에 부여된 특유의 조절 기능을 발휘하였으면 한다. 3000년대를 향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밝은 내일의 위상이 가톨릭신문을 통해 제시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기를 가톨릭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가톨릭신문인협회 회원에게 행한 연설에서『교회도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교회 안에 여론의 표현이 없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중요한 요소가 결핍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핍에 대한 책임은 교회의 목자들과 신자들이 져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언론의 자유는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야당적인 입장도 표현할 줄 아는 고지식한 신문이 되어야 한다. 금세기 최대의 가톨릭 신학자로 추앙받고 있는 예수회 칼 라너 신부는『교회의 역사 속에는 야당의 역할을 수행했던 성인들이 항상 있었으며…하느님의 뜻인 경우 진정한 저항도 서슴치 않았다. 신자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비록 위로부터 아무런 칭찬이나 감사의 보답을 못 받을지라도 허가된 범위 내에서 합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의견을 말해야 할 참된 의무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교회의 개혁도 여론의 압력이 없으면 전통의 힘에 눌려 사라질 때가 가끔 있다. 아무런 불평도 또 변화를 요구하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또 비록 들리더라도 여론의 지지가 없는 몇몇 사람들의 고립된 의견으로 보인다면 교회의 최고 책임자들도 마치 교회 내의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가고 있는 줄로 믿게 될 것이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밝은 내일을 위하여 가톨릭신문 지면을 통해 보여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끝으로 만민의 빛이 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다 차별없이 다 읽을 수 있는 한글만 쓰는 신문, 가로 쓰기를 단행해 주길 바란다.
◆최인호(소설가) - “창작의 영감 제공하는 보물창고”
“나 역시 가톨릭 신자라기보다는 진정한 의미의 가톨릭 작가로 가톨릭신문에 의해 기록되어지기를,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 수 있게 되기를 감히 소망한다.”
누구보다 가톨릭 신자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는 가능하면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 가톨릭 신자임을 드러내 보이려 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할 때 가능하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성호를 긋지만 나는 누가 보거나 말거나 크게 성호를 긋는다. 지금이 박해시대 때 로마 지하 동굴의 교회도 아닌데 나는 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매사에 그렇게 남을 의식하고 소극적인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 최고의 진리인 가톨릭 신앙을 내가 갖게 된 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과 하느님의 은총이 아닐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 신자인 내가 가톨릭신문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다. 가톨릭신문을 보는 것이 햇수로 한 오 년쯤 되어 가는데 가톨릭신문에는 가톨릭 신자들의 모든 정보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추기경을 비롯한 모든 사제들의 동정과 가톨릭과 연관되어 있는 작가, 화가, 음악가와 모든 예술가, 또한 평범한 신자에서부터 사업가 그리고 배우들의 기사까지 모두 나오고 있다. 그뿐인가.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가톨릭 문화에 관한 기사들이 폭 넓게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가톨릭신문을 통해서 나는 시인 정지용이 가톨릭 정신에 입각한 시를 쓴 가톨릭 시인임을 알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T.S.엘리엇의 시를 소설「사랑의 기쁨」속에 다음과 같이 인용했었다.
…나는 나의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조용히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희망은 그릇된 것에 대한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사랑은 그릇된 사랑에 대한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신앙이 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의 희망은 모두 기다림 속에 있는 것.
생각없이 기다려라.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질 않으니.
보스니아인 수녀 베트루스가 세르비아인 병사에게 강간 당해 밴 사생아를 낳아 기르기 위해 수녀원을 떠나면서 총장 수녀에게 남긴 감동적인 편지를 본 것도 가톨릭신문이었다.
비록 뱃속의 아이가 폭력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증인이 될 것을 믿으며 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아이는 제 것이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설령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아기라 할지라도 이 아이에게는 엄마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오래 전에 소원했던 앞치마를 두르고 어머니와 함께 소나무 껍질에서 송진을 얻으려 나설 것입니다. 또한 나는 이 아이에게 사랑만 가르칠 것입니다. 폭력으로 태어난 아이는 저와 더불어 용서야말로 인류에게 평화를 주는 위대한 것임을 증언할 것입니다』
당시 나는 이 편지를 인용하여 연재 중이던 동아일보에「원하지 않는 임신」이란 제목으로 낙태수술의 심각한 폐해에 대해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신문에는 내게 많은 창작의 영감과 소재를 제공하는 보물 창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창간 70주년을 맞아 희수의 나이에 접어든 가톨릭신문에 주님의 은총이 풍성이 내릴 것을 믿으며 나 역시 가톨릭 신자라기보다는 진정한 의미의 가톨릭 작가로 가톨릭신문에 의해 기록되어지기를, 남은 인생을 그렇게 살 수 있게 되기를 감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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