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저는 서울 동대문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6ㆍ25 사변을 겪어, 경기도 화성군 오산 벌음리 마을에 사시던 친척 집으로 피난했습니다. 마을의 가구 수는 30여 가구였는데 피난민들의 수가 워낙 많아 한 집에 수십 명씩 살곤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땅굴을 파고 살았고, 남의 집 방 하나에 여러 가정이 모여 살기 일쑤였습니다. 학교는 새로 설립된 오산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학교 건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밤나무 그늘이나 주민의 방을 하나 얻어, 교실로 삼아 공부했습니다.
그 마을 안에는 조그마한 강당이 있어, 그 강당에서 몇 세대의 신자들이 모여 공소예절로 주일을 지켰고 교리 공부는 그림으로 된 교리 강론집과 교리문답 책을 공부해 영세했습니다. 신부님의 엄격한 교리 시험에 합격되어야만 영세할 수 있었습니다. 교리문제 중 신부님께서 물어봐 못 맞추게 되면 영세를 못했습니다.
성당이 사오십 리 밖에 떨어져 있어, 공소 신자들은 대축일이면 쌀을 가지고 성당 부근에 살고 있는 신자 집에서 자고 먹으면서, 성사도 보고 성체도 모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입학을 해야 할 때인데, 그때까지도 어려운 피난민 살림에, 진학할 수 없는 처지라 감히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입학시험을 보게 도와주셔서 합격은 했으나 가정 형편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었지만 아버지께서 입학금을 다른 이로부터 빌려서 납입케 해주셨습니다. 입학금만 마련해 주셨지 교복이나 책ㆍ노트ㆍ가방 등이 없어 입학해 옆 짝꿍의 책을 보며 공부했고 옷은 성당에서 운 좋게 찾아낸, 여덟 조각으로 된 치마를 입고 다녔습니다.
학교에 다니다 보니 선배가 쓰던 책도 친구들이 얻어다 줬으나, 등록금 못 내어 교무실에 불려가 집으로 쫓겨오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은 있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팔십 세 된 동네 할머니에게 십이단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게도 했습니다. 학교 등록금 마련 때문에 가족과 가마니를 짜서 팔아, 밀린 등록금도 내고 수원까지 올라와 수건을 사서 팔아 등록금 마련하며 공부했습니다. 이런 고생을 하며 중학교 2학년을 겨우 마치고 3학년으로 올라갈 때 도저히 등록금 마련하는 것이 힘에 벅차, 더이상 계속할 수 없어 동생이라도 공부시키겠다는 마음으로 중퇴하여 직장을 갖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 후 서울에 사시는 친척 할아버지께서 부탁드렸더니, 개인병원에서 일하도록 주선해 주셨습니다. 내가 일하는 병원의 원장님 댁에서 살며 근무하게 됐는데 병원 원장님은 참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제대로 하지 못한 공부를, 서울 명동성당 앞에 있는 중앙 강의록에 통신으로 하게 하면서 주일에는 미사 참례하게 하실 뿐 아니라 성가대에서도 활동하게 하셨습니다. 신앙 안에서 착실하게 열심히 살아서 그런지 병원 원장님 가족 네 식구가 영세하여 한 가족처럼 살아왔습니다. 저는 비록 남의 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하느님 은총 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랑도 무척 받았습니다. 동생들 학비도 보태 주었고요.
세월이 흘러 26세가 되어 집에서는 내려와 결혼 준비하라고 성화였습니다. 서울의 내게도 여러 군데서 혼처가 들어왔지만 비신자 아니면 불교 가정에서 말이 오가고 신자 가정에서 들어오는 것은 없어, 수원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수원에 살면서 수원 고등동성당을 찾아 신부님께 활동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JOC라는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저는 JOC에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항상 성당에서만 활동하게 되니 애인이 생기지 않게 되지 않느냐 하셔서 저는 별 생각없이 신부님께서 소개하는 청년이 있다면 혼배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신부님이 소개한 지금의 남편과 혼배했습니다. 남편은 8남매의 장남이었습니다. 혼배할 당시 시누이 한 분은 영세하여 천주교 신자와 혼배하였고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유교를 믿었습니다. 저는 무척 어려운 시집살이로 인해 자존심도 버리게 되었고, 순명과 복종을 하며 계속 살아오는 동안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체험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아 주님의 복음 안에서 살다보니 가족 한 분 한 분이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됐고 뒤 이어 영세하게 됐습니다. 이제 둘째 셋째 시누이의 남편만 영세하면 모든 가족이 신자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무섭고 어려웠던 시집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현재 열심히 신앙에 빠지게 되니 수원교구청 성소국 산하인 성우회 회장을 맡게 됐습니다. 또 수원교구 여성연합회에는 설립되면서부터 임원으로 9년간 활동했으며 레지오ㆍ성가대ㆍ전례ㆍ구역장을 맡게 됐습니다. 이밖에 안양 라자로마을 안의 사제마을 후원회 팀장ㆍ한국 그리스도사상 연구소 수원 전례부장ㆍ한국 그리스도사상연구소 후원회 팀장과 수원 화서동성당 구역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복지 단체에 가입된 양로원ㆍ고아원ㆍ상록촌 등등 여러 군데를 방문하였고 남미 에콰도르의 신학생을 돕기 위하여 수원교구 내 예수 그리스도 수녀회에 장학회도 설립하여 봉사했습니다.
1985년 6월에 설립하여 현재까지 회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는 성우회는 수원교구 내 가톨릭 신학대학이 설립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창립된 단체입니다. 서울에서 우술라회가 조직되어 수원 대신학교를 돕는다는 소문이 들려왔을 때, 저는 하느님께 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당에서 내는 2차 헌금으로써 교구 신학생을 돕는다는 자부심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구의 가톨릭대학 설립에 우리가 적극 나서지는 않았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비로소 어떤 힘의 모체를 조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내 주변에 눈길을 돌린 끝에 수원 영동시장 내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을 방문하여 내 뜻을 전달하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우회란 명칭하에 우리는 신학교 장학금 후원과 함께 친교ㆍ선교ㆍ봉사활동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만 있었지 기대할 만큼의 성과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과 마음이 똘똘 뭉친 우리는 김ㆍ기름ㆍ떡 판매 등등 장학금 마련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치 않고 달려들었습니다.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우리의 모습에 감동한 이들이 하나둘 늘어갔고 직접 활동에는 참여할 수 없으나 별도로 장학금만 후원하겠다는 분들도 생겨났습니다. 처음 설립의 시작은 여자 60명과 후원회원 남ㆍ녀 합해서 1백명이었습니다. 모두 1백60명이 신학생을 돕기 위해 후원회에 가입되었는데 지금은 정회원 37명, 후원회원 1백 명 모두 1백 37명으로 감소되었습니다. 감소된 것은 설립할 때보다 현재 후원해야 할 곳이 많이 생겼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계속적으로 후원자가 증가되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전망으로 보입니다.
회원들 중에는 쉬고 있는 교우, 개신교ㆍ불교 그리고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분들도 계셨고 혼인 장애로 성당에 못 나오는 회원도 있었습니다. 혼인 장애로 성당에 못 나오는 것은 시부모님께서 수십 년간 많은 잡신을 집에 모시고 빌어왔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서 감히 용기가 나지 않아 혼인 장애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정에는 우리들의 기도가 필요했고, 혼인 장애에서 빨리 해방되도록 노력한 끝에 관면혼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잡신을 모시는 시부모님이 무서워 몰래 새벽미사를 다니곤 하였습니다. 가정에 성상도 못 모시고 사는 며느리는 어느날 저에게 가정기도를 청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그 부인의 시부모님께서 제주도 여행 가신 날이었습니다. 저는 성모상과 십자고상을 사서 신부님께 축성받은 후 그 성물들을 들고 그 가정에 방문해 성가를 부르고 가정기도ㆍ주의 기도를 바치는 한편 성수도 뿌려가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부탁이 있다며 광으로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광안의 괴이한 것들을 바깥대감ㆍ안대감ㆍ터주대감하며 소개해 주기에 성가도 부르고 기도하며 성수도 흠뿍 뿌려 주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 뒤 걱정으로 잠을 못 이뤘습니다. 시부모님께서 제주도에 다녀오셔서 성모상과 십자고상을 깨어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했으나 시부모님께서는 정작 여행 갔다 돌아오셨을 때 아무 말씀 없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몇십 년 잡신께 빌던 습관도 버리시고 눈치보며 새벽미사 참례하러 다니는 며느리에게도 『무서운데 아범하고 같이 갔다 오지』하는 말씀도 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은총이 아니고는 어떻게 예전의 무섭고 어려웠던 시부모님이 이토록 변할 수 있었을까요. 이리하여 그 부인은 자유스럽게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건어물을 판매하는 아주머니를 물건을 사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항상 얼굴이 어둡고, 많은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가정을 자주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가끔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방문하면, 아주머니께서 배가 많이 아프니 성당에 다니는 아주머니 기도를 부탁한다고 청해 기도를 해드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바쳐주면 편하게 하루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 건어물 파는 부인은 어느날 저에게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내용은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나 『너는 저 종소리가 안 들리냐』하며 『종소리 들리는 곳으로 가야 살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은 후 꿈이 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인을 성당으로 인도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레지오 단원으로서 계속 기도하며 비신자들을 교리반으로 인도하던 때였습니다. 이 아주머니를 성당으로 데리고 가던 중 아주머니가 별안간 쓰러지며 거품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악령의 짓이라는 느낌이 들어 성당 안 성전에까지 데리고 들어가니 또 쓰러지며 거품을 냅니다. 그래서 저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남편께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 아주머니에게 악령이 장난칠 때 무서웠지만 계속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고 영세할 때까지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악령은 여간해서 나가지 않고 계속적으로 괴롭혔습니다. 영세하는 날 신부님께서 물을 이마에 부으며 세례명을 부르는 순간 여섯 악령이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영세한 후 그 아주머니께서는 건강해지면서 가족이 모두 성당에 나와 영세하고 열심한 성가정을 이루고 삽니다.
저는 목욕탕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목욕탕 직원은 기관장, 이용사, 때밀이 등 여러 직원을 데리고 삽니다. 모든 직원들은 점심을 사 먹어가며 근무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차츰 가족처럼 지내다 보니 매일 점심 때면 중화요리 우동 아니면 자장면으로 점심을 때웠습니다. 저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점심을 먹여야 되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전교하겠다는 속마음이 있었으니 힘들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 가족처럼 지내다 보니 기관장의 가족 4명과 이발사의 가족 4명이 영세하게 됐을 뿐 아니라, 여자 때밀이와 그녀와 결혼할 남자까지 영세하여 이들 두 사람은 성당에서 혼배했습니다.
여자 때밀이가 결혼하게 되자 새 사람을 채용하게 됐습니다. 그 새 여직원이 우리 집을 처음 방문하여 문 열고 들어왔을 때 사자가 입을 벌리며 『이 집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소리 질렀답니다. 그런데도 우리 목욕탕에서 근무하기로 하여 계속 저희 집에 있으면서 여러 번 이상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괴로운 가운데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여 제가 살고 있는 3층으로 데리고 올라가 기도하는 순간, 『까까중이 산으로 올라간다』거나 『아기 동자가 많이 올라간다』느니 『눈이 툭 튀어나온 시꺼멓고 뿔이 솟은 귀신이 춤을 춘다』는 등의 소리를 했습니다. 저는 기도하다 미친 짓 한다고 생각해 그 여직원 어깨를 쳤는데, 그때 제 손이 불쑥불쑥 올라와 악령의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계속적으로 돌봐주다 그 직원의 집까지 방문하여 성수도 뿌리며 몇 차례 기도해 주었습니다. 어느날 그 녀는 저에게 『아들이 몇 개월 전부터 밥도 안 먹고 방 안에서 사방 냉수 그릇을 놓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하여 그 직원의 집에는 악령으로 인하여 온 식구가 괴로워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설득하여 성당 교리반에 넣어 교리를 받게 했습니다. 그녀는 교리를 받는 동안에도 많은 유혹이 따랐습니다. 그녀는 저희 집에 오기전 무당을 시형 엄마로 삼고, 다른 집 목욕탕에서 때 밀어서 힘들게 번 돈을 매달 삼십만 원씩 정기적으로 무당한테 바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리반에 입교시킨 뒤 내가 무당에게 돈을 갖다주지 말라고 말했더니, 무당은 그 돈을 바치지 않으면 신이 노하여 가정에 파탄이 일어날 것이라며 길길이 뛰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겁을 먹기도 했지만 계속적으로 기도해 주며 교리가 끝날 때까지 가정을 돌보아줘 마침내 영세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영세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됐고 귀신 들린 아들도 저절로 나아 결혼도 하고 직장도 다니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저는 혼인 장애나 다른 이유로 쉬고 있는 교우들을 권면하여 성당에 나오게 하였고 개신교 신자를 개종하게 이끌었으며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회원들을 영세하도록 하는 한편 그들의 가족들도 영세하게 했습니다. 회원이 증가함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우정을 돈독히 하고 사명감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 모임ㆍ피정ㆍ성지 순례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우회의 특징은 봉사하는 일이라면 너도나도 앞장서는 자발성과 뛰고 또 뛰는 활동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6년부터 은퇴하신 신부님을 방문하고 영명축일이나 서품축일ㆍ생신ㆍ명절 외에도 자주 찾아보았고 할아버지 신부님들을 위해 경로잔치도 매년 열어 드립니다. 해마다 정기 행사로 봄에는 일일찻집, 가을에는 바자, 성소주일이면 신학교에 가서 음식 바자를 열어 보너스 수익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직책을 주님의 은총이라 생각하면서 마다 않고 순명한 것 뿐인데 분에 넘치는 선물인 주교님의 감사패를 받았고 1996년 3월에는 수원교구 중부지구 선교왕으로 뽑혀 대상과 함께 표창패도 받았습니다.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교회 토착화를 위해 연구하는 한국 그리스도사상 연구소의 건물 신축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바자 수익과 성금 모금ㆍ티켓 판매에 나섰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사상 연구소 수원 전례부장으로 봉사했기에 1996년 11월 30일 한국 그리스도사상 연구소 축성식에서 연구소 소장인 심상태 신부님께서 주신 감사패도 받았습니다. 시간 나는 대로 성서 쓰기와 함께 영성서적을 수시로 읽은 것이 영신적 밑거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구역반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연 두 차례 성지순례나 야유회를 갑니다. 저는 구역장을 맡으면서 구역에 사는 비신자를 입교시켰는데, 제가 전교한 사람 10명 중 9명은 영세하고, 1명은 영세하는 달에 일본에 있는 남편의 초대로 떠나버려 영세 못한 것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구역의 14년ㆍ6년ㆍ5년 등의 햇수를 쉬고 있는 냉담교우 중 7명을 고해성사 받게 하고 다시 성당에 나오게 했습니다. 이것저것 봉사하다 보니 복음 전파하는 데 자신감이 생겨 가정 방문하거나 차를 타거나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믿음을 전하게 되니 여기저기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초대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방문하여 밤 새워 임종을 지켜주고, 수세도 해주고 초상집 일도 돌봐 줍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돌보는 가운데 가족이 불교 신자인 환자는 영세하여 임종하게 되면 천주교ㆍ전례 대로 장례를 치르게 적극 협조하여 줍니다.
노부모 두 분만 영세하여 사시다 선종하신 가정이 있는데 자식들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겠다 하기에 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시다 하느님께로 가시는 부모에게 마지막 효도하는 마음으로 천주교식 대로 하라』고 설득시켜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미사 후에 연령회에서 장지를 돌보려고 하는 신자들을 거부하여 망자의 딸의 친구인 저만 초와 성수를 가지고 따라 갔습니다. 하관예절 때 모든 가족에게 양해를 얻어 촛불 들고 성수 뿌리는 전례에 장남만 뿌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총인지 온 가족이 다 나와 한 사람 한 사람씩 성수를 뿌리게 됐고 뒤이어 친척들까지도 성수를 뿌리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고 저는 하느님의 일은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상시 돌아가시기 전에 항시 기도책에 유서를 써 넣어 두라는 말을 들은 친구의 어머니께서는 매달 위령미사 바칠 것과 연도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선종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망자의 자손들은 믿지는 않았지만 위령미사와 연도만은 계속 바치게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의 임종을 돌보게 되는 동안 쉬고 있는 교우들과 비신자들 중에서 성당에 나오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생활로 인해 정신적으로나 육제적으로 피곤하고 바쁜 생활이었지만 복음 전파로 인해 생활은 신바람이 났습니다.
1995년에는 무척이나 힘든 한 해였습니다. 시아버지께서는 노인성 치매로 5년 넘게 투병생활을 했는데 어린 아이와 똑같은 모습으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차고 사방을 기어다니며 대변을 발라놓는 것이었습니다. 시아버지는 오줌과 대변을 먹기도 하며 심지어는 냉장고 속과 부엌에까지 대변을 바르며 다니시기에 그 냄새가 항상 집안에 진동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대변이 묻은 이불을 빨래해야 했고 사방으로 기어다니며 대변으로 그림도 그려 놓으며 다니신 자리를 청소하면서도 하느님의 은총인지라 구역질 한 번 하지 않고 선종할 때까지 잘 돌봐드렸습니다. 시아버지의 병구완으로 바빴던 때 외아들이 병이 생겨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검사 결과 불치병으로 진단이 나와 지금도 약은 쓰고 있으나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 하느님께 모두 봉헌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으로 유학가 박사 학위를 위한 공부도 잘 하고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91세의 시어머니께서는 노환으로, 17년간 죽과 약을 잡수시며 투병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파출부 없이 생활하다 보니 매일 바쁘기만 합니다. 저는 목욕탕 직원들의 점심식사 준비를 위해 시장에 자주 나갑니다. 물건을 사러 갔다가 시간있는 대로 설거지도 해주고 채소도 다듬어 주며 봉사합니다. 그러다 보면 냉담자는 회두시키고 비신자는 입교시켜 영세도 하게 합니다. 그리고 대녀들의 신앙을 지켜주기 위해 두 달에 한 번씩 저의 집에 모이게 해 식사도 하고 다과도 나누며, 어려운 일이나 기쁜 일이나 모두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쉬고 있는 대녀는 성당에 나오게 하고 외짝 대녀는 남편을 회두시켜 영세도 시킵니다. 또 대녀들과 마음을 모아 사제들을 돕기 위한 일도 합니다.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 귀가 시간이 늦으면 남편한테 꾸지람을 듣기도 합니다. 가끔 「알렐루야 보살」이란 말을 듣기도 합니다. 저는 레지오 단장으로 6년간 활동하면서 년 두 차례의 레지오 단원 부부 모임을 통해 외짝교우 남편들과 술과 음식을 나누게 되는데 이때 저는 전교하여 비신자들을 영세 받게 했습니다. 어느날 남편과 같이 친구의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부인은 개신교 목사님의 딸이었습니다. 개신교 교회에 열심한 부인에게 천주교로 개종할 것을 권면하니 소 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그 가정은 종교문제로 불화가 자주 있었나 봅니다. 그 뒤 남편과 자주 방문하여 맥주도 사 가지고 가 마셔가며 천주교와 개신교에 대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결국 개종하여 남편과 자식들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레지오에 입단하여 열심히 활동하며 훌륭한 성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구역에 장애로 인해 고민하는 한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이 가정의 가장은 두 자식과 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가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이 한없이 미웠고 죽이고 싶은 감정까지 갖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정을 자주 방문하여 맛있는 음식과 과일도 나누어 먹고 아프면 자주 방문하여 약도 사주고 하였기에 서로가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 입교하기를 권면하여 교리반에 열심히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부인의 집을 방문하여 보니 개신교의 찬송가 책과 성서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개신교의 목사님과 신자들이 찾아와 기도해 주고 또 친절하게 대해줘 개신교 교회에 나간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항상 선교활동을 하면서 절감한 바는, 천주교는 선교비에 너무 인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가정을 포기하지 않고 전과 똑같은 활동을 계속하여 다시 교리반에 인도하며 수시로 그 가정을 돌봐 주었습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에 대한 박도식 신부님의 책을 읽어 보았기 때문에 거기서 얻은 지식을 무기삼아 대화하면서 결국 영세시켰습니다. 현재는 온 가족이 열심히 성당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개신교 신자들처럼 적극적으로 복음 전파에 나선다면 풍성한 포도밭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 가족들은 남양 성지를 자주 방문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해졌다고 생각됩니다.
선교하는 데는 희생과 노력이 없이는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우리가 활동하면서 느끼는 문제점은 신부님이나 수녀님께서 구역장이나 반장ㆍ단체장으로 봉사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면 쉽게 거절을 한다는 점입니다. 『시간이 없어요』, 『바빠서요』, 『능력이 없어서요』 등등의 대답을 너무나 쉽게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이렇게 부름을 받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축복이라 봅니다. 누구나가 순명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들이 잘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마음만 먹고 일한다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하여 왔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지는 것을 저는 확실히 느낍니다. 여러 가지 직책을 가지고도 기쁘게 살아와서 그런지 가정생활도 파출부없이 살며 힘들어도 후회하거나 짜증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삽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더 많은 선교활동을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형제나 친척, 이웃이나 동창 계모임에서도 선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고, 또 이옷을 위해 희생하며 사랑을 실천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보답으로 큰 은총을 우리에게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협조자가 되는 것보다 세속생활에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면 우리의 구원은 점점 멀어져가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있는 대로 한 달에 한 번 산행도 하고 요리학원ㆍ장고ㆍ민요도 배웁니다. 우리 본당에서 순교자의 달에 입교식을 앞두고 호구 방문하여 입교는 물론 쉬는 교우 찾기에 적극 협조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제가 맡은 구역은 화서시장을 낀 구역이라 1백40개의 가정을 방문하다 보니 개신교 신자가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은 천주교ㆍ유교ㆍ불교ㆍ여호와의 증인 순이었으며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이가 제일 적었습니다. 각 가정마다 방문하다 보니, 다른 종교를 믿고 있으면서도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 말도 못 붙이게 『가세요』하는 사람도 있었고 천주교는 성모님을 우상 숭배한다는 사람, 천주교를 알고자 여러 가지로 물어 보는 사람 등등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천주교를 소개했습니다. 『천주교는 예수님을 으뜸으로 모시며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이지 결코 마리아를 믿는 교회는 아닙니다. 천주교는 하나의 교회이며 조상을 위해 제사도 지낼 수 있습니다. 천주교 신부ㆍ수사ㆍ수녀들은 독신으로 살며 봉사합니다』. 이렇게 소개하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여 입교시켜 세례를 위한 교리도 받게 하고 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개인의 영혼을 구령할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기도하면 그들도 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기도는 많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많은 선교를 하였고 5년 이상 50년까지 쉬던 교우도 회두시켰습니다. 우리들은 비신자들을 입교식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교리 있는 날은 전화도 하고 방문하여 교리반에 꼭 인도하여야 그 분이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 세례를 받게 됩니다. 주님은 단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고 그것을 세 말까지 이어가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지금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며 함께 노력한다면 우리는 다시 주님께서 세우셨던 하나인 교회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신바람 나는 복음의 사도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매일 밤 성시간을 지키고 그 분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며 이끌어주실 것을 기도드리며 아직도 무수히 널려져 있는 우리 주위의 황금어장으로 부족한 저를 파견하시어 저를 통한 하느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선포되기를 오늘도 기도드립니다. 선교를 많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레지오 수첩에 냉담자ㆍ쉬는 교우ㆍ교리 중단자ㆍ예비자ㆍ입교시킬 사람으로 구분하여 성명ㆍ전화번호ㆍ주소를 기입하고 몇 년 전 활동 못한 것도 하나하나 풀어가며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2년 연속 수원교구 선교왕으로 뽑혔습니다. 주교님께서 기뻐하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런 큰 상을 받게 된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지만 사랑하는 남편께서 시간을 배려해 주셨기에 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리내 성지 대건 안드레아 회관에서 평협 임원들이 수고하셨고 연로하신 김남수 안젤로 주교님께서 시상하셨기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바치며 남편께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당선 소감 - 이순자(막달레나)
+찬미예수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새 삶을 갖다 주셨으니 야훼 우리의 주님께 감사, 찬미의 노래 부르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당선하게 하신 주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성 목요일 발 씻김 예식, 철야조배와 성 금요일 오후 3시 십자가의 길, 주의 수난 예절과 부활 성야미사 성가 준비, 부활 계란 준비에 바쁜 날이었습니다.
전화벨 소리에 전화를 받고 보니 체험수기 쓴 것이 최우수상이라는 전화를 받고 나서 저는 무릎을 꿇고 감격의 눈물로 감사기도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6월 4일 김남수(안젤로) 주교님 생신에 매년 연로하신 신부님과 교구 신부님을 모시고 행사를 합니다. 그래서 만약 체험수기 쓴 것이 당선이 되어 당선금을 받게 되면 은퇴하고 계신 할아버지 신부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 텐데 부족한 내 글이 설마 당선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는데 내가 쓴 글이 최우수상이라니….
내가 잘나서 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이 함께 하셨기에 이 큰 영광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이루게 하시는 주님이시기에 무엇이든 용기를 갖고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번 상금을 주님께 모두 봉헌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영광을 주님께 드리며 가톨릭신문사 편집부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기쁨의 생활 안에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심사 총평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된 이순자(막달레나)씨는 전교ㆍ신학생 돕기ㆍ은퇴사제 돕기ㆍ선종 봉사를 비롯한 광범한 활동에 대한 체험을 진솔하고 평이하게 서술했다.
이 막달레나씨는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신앙을 뛰어넘어 교회 공동체가 요청하고 이 시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평신도적 사명을 이타적인 마음으로 오랜 기간동안 수행했다.
문장이 부드럽지 못한 면이 없지 않으나 신앙활동에 대한 진솔한 체험과 체험에서 우러나온 내용들은 뼈 있는 말로 부각된다.
우수상을 받은 이희숙(마리아)씨의 수기는 문장이 부드러워 읽기에 부담감이 없다. 이 수기는 신앙 안에서 투병하는 와중에도 이웃들을 따뜻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잔잔하게 표현돼 있다.
오규실(바울로)씨의 수기에는 작은 본당이지만 본당 내에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맡고 의욕적으로 활동을 펼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좋은 수기이다.
이외 장려상을 받은 5명의 수기에는 어려운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며 전교에도 열심인 모습이 대체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상 8명의 수기들은 세속적으로 각박한 사회 속에서 신앙을 견지할 뿐 아니라 이 신앙을 이웃에 널리 전파하려고 온갖 애를 써온 수상자들의 노력이 엿보이는 좋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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