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중국 천주교회의 오늘 - 김영환 몬시뇰 <중국 북경 한인교회 주임>
양분돼 있지만 교리상으론 하나
현 중국 교회, 1백15개 교구에 4백만 신자 성당 4천5백 개, 신학생 2천7백여 명 달해
많은 분야에서 그렇듯이 오늘의 중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알고 싶으면 중국의 역사 속에서 천주교회가 자리잡게 된 연유를 알아야 한다.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인 635년경에 유럽의 선교사들이 아닌 페르샤 사람인 선교사 알로펜 주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복음을 전파했으나 불교도들의 박해로 곧 소멸했다. 그후 13세기 이태리 프란치스코회 소속 선교사가 북경의 주교로써 처음 천주교회를 세웠으며 원조가 망하면서 명조에 의해 쫓겨났다.
1582년 예수회 수사인 마태오 리치와 그의 동료들이 중국문화와 서양문화를 접목시키려 노력했고 그후 아편전쟁 (1842년) 이후 서구 열강들이 물밀듯이 중국에 들어왔으나 불평등 조약으로 많은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았다.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함과 동시에 공산정권(1949년)은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정부에서 하는 모든 일에 협력하지 못하도록 여러 번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애국심을 보여주도록 요청된 중국 신자들은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중국천주교애국회(1957)」라는 것을 설립했다. 그후 천주교 애국회는 정부 관계에 여러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한 천주교회 내의 대변기구 혹은 단체가 되었다.
중국 천주교회는 이로써 내부 갈등이 시작되었다. 애국 애교 삼자원칙이라는 3원칙을 내세우면서 교황청과의 관계도 유지하려는 시도는 국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이라 본다.
문화혁명(1966~76)이 시작되고부터는 더욱더 중국 교회는 고통의 나날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자기들의 조국에는 불충하고 제국주의의 로마에 충성한다』고 백안시되었다. 그리고 신자들은 자신들의 역사때문에 약점을 잡힌 셈이 되었고 우리도 애국심이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면 말살될 위기라고 느꼈던 것이다.그러나 중국 정부에 의해 수많은 주교, 신부, 신자들이 투옥되고 줄어갔다.
지하 교회와 천주교 애국회간에 내부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은 3자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발표를 한 후 교회는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하 교회는 『중국이 공산화되고 지금까지 우리는 목숨을 걸고 순교정신으로 박해를 받아왔다. 이제와서 교황청에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3자원칙을 내세워 정부에 협력할 수 없다』는 주장이며 애국회는 『나라 사랑이 잘못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지금까지 양교 또는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지칭되어 왔지 않느냐? 이것을 불식하고 진정한 뜻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써 중국 교회는 두 갈래로 갈라졌고 그 골은 한없이 깊어갔다. 그렇다고 중국 천주교회가 교리상 갈라진 것은 아니다. 교황에 대한 충성심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혹자는 이단이라고 혹평을 하지만 교리상으로 보편교회와 다르지 않다.
현재 중국 교회는 1백15개 교구에 70명의 주교, 1천여 명의 성직자, 2천5백 명의 수도자, 4백만 명의 신자들을 두고 있으며 31개 대신학교에 4천5백 개의 성당이 있다. 신학생 수만 해도 2천7백여 명에 달하고 있다.
◆통일 전후 독일 교회의 역할과 교훈 - 김석중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교수>
실제 삶 속에서 윤리ㆍ정신적 통합 중요
새 희망 주고 올바른 도덕 가치 알려야
동서독의 재통합은 세계 역사 전개의 호기와 국민들의 자유와 일치에 대한 갈망의 합작으로 볼 수 있으나 분단 이후 끊임없는 공식 비공식적 상호 접촉,그리고 식견있는 정치인들의 부단한 노력에 따라 앞당겨 실현됐다.
교회도 자기의 고유한 영역을 언제나 고수하며 국가의 분단을 반드시 교회의 분단으로 보지 않았고 조직적이고 법적인 중심을 바티칸과 그 관할권 안에 두고 동서독 교회간의 상호 접촉을 언제나 시도하였다. 동구권의 점차적인 개방, 특히 헝가리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국경 개방, 동독인들의 서독 방문, 소련연방의 개방정책, 구 서독인들의 용기 있는 결단 등이 구 동독의 서독으로의 흡수통합이라는 형태로 국가의 일치를 이루게 했다.
특히 1989년 5월 구 동독 지방의회 부정선거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반대하여 규탄을 시작하면서 그해 통일로 이어지는 10월 혁명에 개신교와 함께 구 동독 큰 도시에서 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조했으며 성직자들은 양심에 따라 일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며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통일과정에 일조했다.
통일 후 교회는 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와 함께 종교적인 삶에서 오는 과제와 교회의 기본법을 실현시키고 실제의 삶 속에서 이를 전개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경주했다.
통일 뒤에도 독일 교회는 모든 면에서 도움을 주어야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특히 형제적인 우애로 여러 상태의 곤경과 문제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유치원부터 양로원까지 철저하게 무신론의 제도 속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하느님을 소개하고 무분별하고 어지러운 무신론적 사고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철의 장막 지대에서 삶의 전반에 걸쳐 상처 받은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어야 하고 다른 경제체제 속에 올바른 도덕적 가치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교회가 바라는 진정한 일치는 정치 경제 분야에서처럼 시간적인 강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실제의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녹아드는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가치의 통합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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