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실한 고해 위한 실천적 모습
① 성찰:「고백할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대한다. 과연 그럴까? 그들은 정말로 고백할 것이 없는 사람들일까? 고백할 것이 없다는 것은 실수하거나 잘못한 것이 없고 그래서 실패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천사가 아닌가? 잘못한 것이 없는 존재는 천사뿐이기 때문이다.
보통「성인성녀」라고 칭송 받는 이들도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이다. 그분들은 고백할 것이 너무 많아 일주일이 멀다하고 종종 고백했다. 그들의 경우가 말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그 답은 바로「성찰」이다.
그들의 성찰은 10계명의 말 마디만을 기준으로 준수했느냐 하지 못했느냐, 몇 번을 못했느냐 라든지 준수 여부, 횟수 여부가 대죄냐 소죄냐 하는 따위로 자기 자신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판단해 보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들은「하느님과 자신의 관계」,「교회와 자신의 관계」,「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이들과 자신의 관계」,「사회생활 속에서 비신앙인들과 자신의 관계」,「가정 공동체의 구성원들 즉 가족들과 자신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그 관계 안에서「하느님의 아들 딸다웠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혹은 그리스도의 제자다웠느냐 그렇지 않았느냐」,「그러한 관계들 안에서 먼저 화해를 요청해야 할 부분들은 어떤 것인가?」라는 하느님 중심의 기준을 놓고 자기 자신을 비평하면서 반성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10계명 하나하나가 포괄하고 있는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면면들은 물론「했느냐 안 했느냐」라는 소극적이면서도 자기 중심적인 기준을 넘어 적극적이면서도 공동체 중심적인 면 즉「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대상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여부라는 면까지도 내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② 통회: 성찰한 내용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하면서 뉘우치는 내적 상태는 성찰과 거의 동시 발생적이다. 따라서 통회는 성찰의 순간마다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성찰의 시간이 곧 통회의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깊은 성찰일수록 깊은 통회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통해서「모든 것을 통회합니다. 그저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만 한다고 해서 진정한 통회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슴을 치며 눈물과 함께 하는 통회」가 가장 좋은 통회의 본보기이지만 감정 표현이 각양각색인 까닭에 모두가 그렇게 하긴 힘들다. 하지만 규정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긴 해도 통회의 내용은 항상「하느님께로 정향된 자신」을 재확인할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묵상과 명상이라는 내적 침묵은 꼭 필요하다.
③ 정개(결심 혹은 결단): 성찰 혹은 통회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동시 발생적이다. 따라서 이 일을 위해서도 묵상과 명상이라는 내적 침묵이 필요하다.
④ 고백(자기 고발): 성찰과 통회 그리고 정개한 내용을 고백하는 일은 자기 고발이자 화해의 요청 행위이다. 이 일은 뚜렷한 말로 밝혀야 한다. 창피하다는 생각에 얼버무리거나, 알맹이를 빼고 뭉뚱그려 말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고백을 듣는 사제의 곤혹스런 입장을 지레짐작 생각해 준답시고 간추려 고백해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하여도 통회하오니 사하여 주소서」라는 말로 간단히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표현은 성찰, 통회 그리고 정개한 내용 이외에도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인정할 것을 더 이상 밝혀 내지 못했을 때 급기야 하느님의 선처만을 바라는 통회자의 하소연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리라는 식으로 그 표현을 써서는 안 될 일이다.
⑤ 사죄(선사)와 보속(증거): 화해의 선언이자 고해(회개와 화해)성사를 완성하는 사죄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이 선물은 어떠한 조건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람이 당신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함으로써 어색하게 된 처지를 사랑이라는 선물(은총)로 새롭게 해 주신다. 고백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분의 사랑, 그분의 선물(은총)을 받고자 하는 열망만 있으면 된다. 물론 이 열망은 그분께 대한 철저한 믿음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사죄를 받은 후 고백자의 생활 방식은 기쁨과 평화 그리고 행복을 누리는 사람다운 증거의 모습을 견지해야 한다. 사제라는 봉사자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죄(사랑의 선사)가 확인되기 전에 제안되는 보속거리가 1회적인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 보속거리야말로 증거 행위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보속거리를 토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 회개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폭 넓고도 속 깊은 삶이 항구하게 진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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