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생은 과연 현대인에게 위안이 되는 것일까?
환생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양립될 수 없는 사상이다. 환생을 믿느냐 그리스도교의 부활을 믿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현대인들은 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얻으려고 한다. 현대의 부정적인 사건들을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전생의 삶과 관계에서 파악하려는 환생론자들은 환생을 믿음으로써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문제는 그들이 믿는 것이 진정한 위안을 제공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과 위안을 찾아
앞에서 우리가 보아왔듯이 뉴에이지의 환생사상은 힌두교, 불교의 환생과는 달리 인간(Ego)이 환생의 적극적인 동인으로서 행복과 위안을 느끼려고 한다. 환생사상에서 이러한 선택은 현재의 삶뿐 아니라 내생의 삶을 규정한다. 그렇게 될 때 어린 아이가 태어나 얼마 있지 않아 몹쓸 병에 걸려 죽는다든지 청소년들의 자살, 에이즈 환자들의 고통, 수많은 유대인의 가스실의 잔인한 학살 죽음 등과 같은 처절한 상황도 모두 전생의 자아나 부모들의 선택이라는 결과가 된다. 이것은 진정 위안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환생사상에서 위안을 얻는 또 하나의 이유는 수많은 환생을 거듭함으로써 정신적 영적으로 더 성숙되고 완전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옛날보다 현대는 인간의 탐욕에서 일어나는 전생이나 윤리 도덕적 질서의 파괴에서 야기되는 악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결국 성숙된 완전한 인간 실현이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우리가 죄, 악 그리고 잘못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바라볼 때 개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죄나 악은 더욱더 확산되고 있으며 개인의 정화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제될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종족전쟁(옛 유고슬라비아, 자이레)이나 나찌즘에 의한 많은 사람들의 학살 등이다.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악은 인간의 자체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절대자 하느님의 힘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환생론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세력을 진지하게 보지 않으려고 하며 인간의 힘을 과장하며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 세상의 죄악의 세력을 이기셨고 인간의 잘못은 용서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환생사상 안에서는 자기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짐을 함께 지고 가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를 거부한다.
▲자기 스스로를 구원
또한 환생사상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깨달음이나 자기 실현, 성장이라는 구실로 하느님이 명하는 윤리나 도덕을 따르지 않아도 되며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의 결정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자신의 힘든 노력에 의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문제는 또한 이 세상의 삶에서 자신이 더 나아진 영적 성숙을 볼 수 없는데 내생에서 더 완벽한 인간이 되어 구원되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상상만으로 가능할 뿐이다.
과연 환생사상은 낙천주의 사상일까? 여기에는 의문점이 있다. 자체 구원을 주장하는 환생사상은 어떤 면에서는 현대인들을 매혹시키지만 무책임한 낙천주의라고 볼 수 있다.
환생론자들에 의하면 전생에 대한 회상은 어떤 면에서는 많은 이들의 위안거리가 된다고 주장한다. 전생의 경험들은 현재의 어떤 상황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며「내가 누구였는가」하는 것이 현재의 삶에서 내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위안을 제공한다고 한다.
전생 회상은 자막에 새겨진 유아기 때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들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들을 대변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최면술에 의한 퇴행적인 기억으로 유아기 때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과 기억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사목적인 면에서 중요하다. 유아기의 경험으로 되돌아가는 이러한 정신분석적 방법은 유아기 때로 되돌아 감으로써 그 때의 경험들을 현재의 의식 상태로 떠올려 현재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장애를 해결시키고 자기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며 내적인 갈등에서 벗어나게 도와 준다는 점에서는 이 방법의 유용성은 고려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나 경험들이 마치 한 개인이 전생에 지금과 똑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고 주장할 때 이것은 치료적인 목적을 넘어서는 것으로 상상에 의한 강압적인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대의 어떠한 전생 회상도 환생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뉴에이지의 환생론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하는데 지금의「나」라는 존재와 전생의「나」라는 존재를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전생의「나」라는 존재는 전생에 있어서 한 개체이며 지금의「나」는 현재에 있어 한 개체이므로 동시에 자동적으로 동일시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지금의「나」라는 존재가 전생의 다른 개체인「나」의 경험을 살피게 될 때 현재의「자신」은 과거의 그「자신」이 아니게 된다.
▲과거의 삶에 집착
그리고 환생론은 항상 진보적인 것이 아니다. 전생의 영적인 삶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는 현재의 삶을 볼 때 이 이론은 확실성이 없는 것이다.
환생론에서는 전쟁의 경험과 기억을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이 미래의 생(내생)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재는 시, 공간에 제한되어 있지만 미래는 인류에게 항상 개방되어 무한한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조건 지워졌던 과거의 삶처럼 미래를 조건 지우려 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또한 환생을 믿음으로써 과거의 삶에 집착해 현재의 삶을 등한시 하는 것은 한 인격체의 지상의 삶을 살아가는 데 위험한 것이다.
전생의 모든 경험들이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자기의 전생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전생의 자기가 바람직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면(살인자 등) 이러한 기억은 현재의 자기를 도와 주기는 커녕 오히려 심리적 정신적 부담과 불안을 제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생 회상에 대한 신뢰는 현재의 삶에 자유보다는 구속을 제공한다.
이처럼 환생은 마치 위안처럼 과장되어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깊이 살펴보면 결코 위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환생을 믿는 이들은 이러한 이론 밑에 숨겨져 있는 진리를 진지하게 사고하고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결국 돌파구가 없는 벽에 감금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사목자들은 신자들의 생활과 신앙에서 야기되는 문제점을 도와 주어야 한다. 가령, 환생을 믿고 그리고 그것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거나 현재의 삶을 도와 준다고 확신하고 있는 신자들이 사목적인 도움을 청해올 때 사목자들은 이들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지만 항상 진리이신 그리스도 관점 안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때 그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2.환생 이론에 대답하는 크리스찬의 통과 전례들
가톨릭교회 안에서 거행되는 통과 전례는 오늘날 넓게 확산되고 있는 환생에 대한 믿음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환생에 대한 성교회의 독트린에 의한 답변은 전례 안에서 보여지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환생, 전적으로 부정
성 교회 안에서 거행되는 통과 전례는 죽음이라는 수수께기 앞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응답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전례는「비아티쿰」(Viaticum 봉성체)과 의례(Commendation), 장례식(Funerals) 의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전례는 가톨릭교회의 믿음을 이해하고 신앙을 성숙시키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육체부활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마 전례 안에 보여지는 통과 전례는 죽은 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순간에 시작하는 것이다. 비아티쿰은 Via와 Ticum이 결합된 말로서 망자인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여행을 막 시작한다는 의미이며 성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성체를 영하게 함으로써 망자를 격려한다.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마직막 날에 부활된다).
비아티쿰에서는 또한 시편 114장이 응송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이 파스카 신비의 차원으로 해석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례성사를 통해 물 속에 잠김으로써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파스카 신비)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벌써 아버지의 나라로 통과하고 있다. 비아티쿰의 전례는 죽음이란 최상의 파스카의 신비이며 또한 죽음이란 하느님 나라인 저 세상으로 가는, 다시 이 세상에 환생하지 않는 결정적인 여행이라는것을 가르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의례 전례에서는 교회는 죽음에 임박한 신자를 위해 예절문을 염경한다. 이 기도문은 8세기 때부터 전통 안에서 전해 내려온 것으로 망자에게 자신을 창조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 가라고 촉구한다. 죽음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이며 인간 측의 응답이다. 이 전례에서는 망자의 여행은 바로 하느님 품에서 끝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죽은 이들이 천상의 시민으로서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마지막 날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다. 여기에는 환생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다. 한 인격의 완전 실현은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참조 필립 3, 3) 부활에 대한 희망인 장례 예식에서는 초기 로마 전례에서 볼 수 있었듯이 망자의 육체에 대한 존경심이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육체는 세례성사를 통해 성령의 궁전이 되었으며 마지막 날 일어날 육체 부활에 대한 존경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끝으로 육체를 땅에 묻는 장례식은 그리스도의 장례식과 연결되어 있다. 묻힐 자리를 측정하는 이유는 죽은 육신은 무덤에 묻히더라도 그리스도의 변화된 영광스러운 육체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리라는 희망의 징조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장례 의식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파스카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장례식은 각 나라와 각 지방의 환경과 전통에도 밀접히 적용시켜야 한다고 언명한다(전례 헌장 81).
▲사목자들 사전 지식 필요
그렇지만 뉴에이지의 환생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장례미사에서 독서나 상징, 음악을 선택함에 있어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거나 그리스도교 교리와 대치되는 제안을 해올 때는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나 부제들은 이러한 경향을 선별할 수 있는 사전 지식을 가져야 한다. 사목자들은 그들과 대화를 통해 그들의 열망을 이해할 수 있고 그리스도교의 부활의 복음적 메시지를 더욱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 환생사상은 어쨌든 성교회가 집전하는 통과 전례(Liturgies of Christian Transition)의 성격상 보더라도 그리스도교 신앙과 양립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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