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요한 15, 4).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사형 언도를 받은 니콜라오(교도소에서 세례 받음)에게 교화 담당 신부로서 물었을 때 『어머님을 꼭 한 번 만나게 해 주십시오…』(필자는 84년 9월~87년 4월 안양교도소, 95년 2월~97년 2월 수원교도소 천주교 종교위원으로 재소자 교화 담당).
지난 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며 마지막으로 불효 자식으로서의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일까?… 아니면 나이 사십이 넘도록 홀어머니(67세)를 제대로 한 번 모시고 살지 못했으니 혹시 얼마간의 유산이라도 남기기 위해서 뵙게 해 달라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의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통념적인 생각으로 니콜라오 어머님께 연락을 드려 모자상봉을 마련해 드린 일이 눈에 선합니다. 『한여름밤에 고슴도치는 새끼 고슴도치를 품에 꼭 껴안고 잔다고 하는데…』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 부모 막론하고 자식 잘 되기를 바라며 한 평생을 산다고 하는데…. 니콜라오는 유복자였습니다. 결혼한 지 육 개월도 안 되어 아버지는 6·25 전쟁터에 끌려가 전사한 후 니클라오 어머니느 금이냐? 옥이냐? 하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이사 43, 4) 유복자 아들이 원하는 일이라면 하늘의 별을 따서(?)라도…, 기침이 심해 잠을 이루지 못하면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냇가의 얼음을 깨고서라도 붕어를 잡아 달여 먹이면서까지 키운 자식인데 어쩌자고 이 지경이 되었는가? 니콜라오 어머니의 한 많은 한 평생의 이야기는 장편소설 한 권이 모자랄 정도의 애환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서울로, 말이 새끼를 낳으면 제주도로…』보내라는 말대로 소를 팔고 논과 밭까지 팔아가며 중학교 때부터 서울로 올려 보내어 공부를 시켰는데…, 이모집이 불편하다고 하면 학교 가까이 하숙을 시키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문중 땅까지 팔아 공부를 시켰는데…, 급히 용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급전까지 빌려가며 공부를 시켰는데…,『부처님도 무심하지…』이게 웬 일입니까? (니콜라오 어머니는 불자).
대학원까지 나와 직장에 입사했으면 됐지! 무슨 영문인지 사업을 한다고 어거지를 써 가며 집까지 저당 잡혀 자가용을 굴리며(70년 초에는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이 별로 없었음) 큰 소리 뻥뻥 치더니…, 그것도 양에 차지 않아 이모집까지 은행에 저당 잡혀 무역을 한다고 비행기를 시내버스 타듯이 하더니 『니콜라오 아버지도 무심하시지! 아들이 사형 언도 받기까지 하늘나라에서 무얼 했남유?…』
서울로 올려 보낸 후 30여 년 동안 아침 저녁으로 장독대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불공을 드렸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4대 독자요 유복자인 아들을 대신해서 이 에미가 죽을 수는 없습니까? 자식을 키우는 재판장님! 전능하신 하느님! 자식을 잘못 다스린 이 에미가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어떻게 합니까? 법대로가 아니라 그저 살려만 주신다면 무기징역도 좋습니다. 종신징역도 마다하지 않겠슴니다.
숨 죽이며 모자상봉을 지켜보던 이들의 눈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머니에게 잘못을 청하며 용서를 청해야 마땅할 아들은 악을 쓰며 어머니의 팔목을 물어 뜯으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마치 개싸움을 하듯 어머니를 끌어안고 땅 바닥에 뒹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진짜 나를 낳은 어머니라면 내가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언제 한 번 회초리를 든 적이 있었습니까? 안 돼! 한 번 한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언제 한 번 울어 본 일이 있었습니까? 큰 소리 한 번 내신 일이 있었습니까….제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은 자식을 잘못 키운 어머니 탓입니다. 야단이라도 한 번 치셨으면 이렇게 죽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저 대신 죽어야 합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어머니!…』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아들은 지쳤는지… 아니면 기운이 다 빠졌는지 어머니 품에 안겨 소리없이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게 다 제 탓입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통곡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는 겁니까? 늘 매섭게만 다스리던 교도관도,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동행하였던 사람들도, 하늘도 땅도 통곡하였습니다. 위로할 말도 잊었습니다. 철창 밖에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단풍잎도 슬피 울어야만 했습니다. 가을 바람마저도 함께 울었습니다. 윙! 윙!….
『너희는 나를 떠나지 말라. 나도 너희를 떠나지 않겠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나에게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 할 것이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 4~5). 다칠세라 그르칠세라 조심조심 타이르시는 어머님의 말씀과 훈계를 잘 받아들였다면, 바다보다도 깊고 하늘보다도 넓은 어머님의 사랑의 눈길을 스스로 외면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들 하나 잘 되기를 몸부림치시며 살아가시는 어머님의 모습을 잊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 5). 이제는 더 이상 하느님의 시야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충동에 현혹되지 말고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여 떨어져 나가는 안스럽고 억울한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단 들고 올 때 춤추며 기뻐하리이다』(시편 126, 5) 하셨으니 오늘도 또 내일도 어제처럼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신 하느님 앞에서 『잘난 체 하지 않게』(야고 3, 14) 하옵소서. 혼자 다 컸다고 자만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아멘….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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