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 김연중(엘리사벳 작고)
장남 김인중(57):세계적인 화가, 도미니꼬회 신부, 프랑스 거주
차녀 김효중(마리아 글라라·53):대구효성가톨릭대 국문과 교수, 문학 박사
차남 김대중(모리스·47):현 원창그룹 연구소장, 상무
삼남 김영중(바오로·46):외국어대 화란어과 교수, 문학박사
삼녀 김계중(카타리나·44):파리 8대학 박사과정, 교육학 전공, 프랑스 거주
사남 김억중(토마스·42):한남대 건축과 교수
오남 김항중(요한·41):대전대 심리학과 교수
한 집안 형제의 이력이다. 모두 5남 3녀 중 대학 교수가 4명, 화가이자 사제가 1명, 대 그룹 고위 간부 1명, 현재 박사과정 중에 있는 이가 1명 그리고 10년 전 불치의 병으로 작고 한 이가 1명이다. 더군다나 차녀 김효중씨의 남편 서울대 언어학과 김윤한 교수와 막내 김항중씨의 아내 원광대학교 약학과 이혜숙(카타리나) 교수를 합치면 이 집안엔 교수만 해도 6명이나 된다.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고 있는 형제들이 장남인 김인중 신부의 서울 개인전(서울 백상미술관 전시 중)을 계기로 5월 14일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형제들이 이날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지난 86년 10월 장녀 고 김연중씨가 작고하기 전에 모인 이후 처음이다.
부부 동반을 한 형제들이 모두 13명, 손자 15명, 증손자 4명 모두 32명이나 되는 대 식구가 이들을 길러낸 김영덕(세례자 요한·80)옹과 신소저(모니카·83) 여사가 살고 있는 대전 자양동 저택에 모였다.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며 그동안 못다한 얘기를 나누는가 하면, 부모님 생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가족사진 촬영을 하기도 하는 등 모처럼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간혹 이러한 형제들의 영화를 보지 못하고 하늘 나라로 먼저 간 장녀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는 신소저 여사의 애처로운 모습에 잠시 슬픔에 잠기기도 했지만 이날 모임은 형제지정을 느끼게 한 나눔의 자리였다.
누가 보아도 부러운 자리였다. 가난한 시절 어떻게 그 많은 자식들을 이처럼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었을까? 단순히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교수가 많아서가 아니라「성가정」을 이룬 8남매들의 다복한 모습에 이들을 길러낸 어머니 신소저 여사가 더욱 위대해 보인다.
신소저 여사는『나는 별로 한 것이 없다』라며『자식들이 열심히 살아줘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인데 이런 영화를 보지 못하고 부모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큰딸이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고 한숨을 토해냈다.
10년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고 김연중씨는 신소저 여사에겐 더더욱 소중한 딸이었다. 집안이 어려워 유일하게 고등학교만을 졸업한 고 김연중씨는 어린 동생들을 어머니와 함께 돌보며 뒷바라지를 했던 장녀였다.
신 여사는『큰딸이 고등학교 시절 어린 동생을 업어서 키우곤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고 놀리기도 했다』고 회상하면서『큰애의 자식들이 모두 의학 박사가 되는 등 잘살고 있는데 고생만 하다 간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신소저 여사는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큰 딸의 죽음이었다고 한다. 또 먹을 것이 귀한 그 시절 고구마로 끼니를 떼우곤 했는데 자식들이 많다 보니 그릇 8개에 똑같이 나눠 줘야 했고, 모유를 못 먹이고 우유를 먹여야 했던 시절 배 고파서 우는 아이를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다해야 했다고 한다.
원래 이들 부부에게는 대전역과 서대전에 전답과 토지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업을 하면서 사기를 당하고 나자 밥먹을 때보다 굶을 때가 더 많은 빈가가 돼 버린 것. 등록금 밀리기가 부지기수고 끼니마저 걱정되다 보니 자식들 교육을 엄두도 못냈다고 한다.
신소저 여사는『당시 여섯째인 계중(파리8대학 박사 과정)이가 굶기를 밥 먹듯이 했지만 공부만은 하겠다고 책보를 메고 학교를 갖다 와서는 대문에서 쓰러지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며『자식들이 오늘날 이처럼 잘 된 것은 우리 부부의 도움도 있었지만 스스로의 악착같은 노력이 바탕이 된 것』이라고 자녀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소저 여사에 의하면 끼니가 걱정이 되어도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고 갈 준비물을 얘기하면 애들 아버지가 오밤중이라도 꼭 구해다 주곤 했다고 한다. 그만큼 신소저씨의 남편 김영덕옹은 배움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 자신이 60대에 충남대학교 경영대학원을 마쳤을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했다고 한다.
신 여사는『남편의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을 다만 옆에서 보조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해 하면서『자식들이 화목하게 잘 살게 된 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영덕옹 역시『개인적으로 어려서부터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라며『그러나 자식들이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그들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이 바탕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영덕옹과 신소저 여사의 보람은 자녀들의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 보다도 그들이 모두 성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두터운 형제애로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은 김인중 신부가 사제로 서품 된 74년 이후 모두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 당시 공항에 마중 나온 부친 김영덕옹마저 이제 외국 유학도 마쳤으니 장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가톨릭 신앙에 대해 전무했는데 이들 모두가 장남의 사제서품 후 독실한 신자가 된 것이다.
김인중 신부는『소신학교 미술 교사 시절 제자들에게 감동을 받아 사제가 되기 위해 무작정 프랑스로 떠났었다』고 회고하면서『불란서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돌아오면서 부모님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넥타이를 맨 기억이 난다』며『그러나 부모님들과 형제들이 나를 잘 받아 줘, 지금은 모두 열심한 신자 생활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들에 의해 신자로 입문한 신소저 여사. 어렵고 힘든 시절을 의연히 버텨온 우리 시대의 위대한 어머니인 그녀는 모처럼 자식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기쁨보다는 하늘 나라로 먼저 간 큰 딸을 기억하며 한숨을 짓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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