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건네시자 그들은 잔을 돌려가며 마셨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 두어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나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마르 14, 22∼26).
1974년 12월 7일(금) 밤 12시 어머님은 저에게 『요셉 신부! 내일 사제로서 첫 미사를 봉헌한 후 소임지(보좌신부)로 떠나면 언제 집에 와서 가족과 잠을 잘 수 있을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장소에서 한 평생 열심히 사제생활을 하리라 믿으며, 살다 보면 보람 있는 일이 더 많겠지만은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힘들 때도 있겠지…. 사제서품 축하 겸 부모로서의 마지막 유산이니 잘 간직했다가 꼭 필요할 때 유익하게 쓰도록…』말 끝을 흐리시면서 정성 들여 포장한 성경책 크기 만한 작은 상자 다섯 개를 주셨습니다.
첫 보좌신부로 부임한 후 일주일도 안됐는데 주임 신부님이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어 첫 성탄을 준비하는 새 신부의 하루하루는 긴장과 피로의 연속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새벽미사 후부터 밤 12시가 넘도록 하루 종일 혼자서 판공성사를 드리는 새 신부로서의 보람은 그 나름대로 컸었지만 판공성사 시작한 후 닷새 만에 혼자서 주일미사 여섯 번을 봉헌한 후 제의방에서 제의를 벗는데 코가 스물스물거리더니 왠 코피가 갑자기 쏟아져 제의를 세탁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성탄 이틀을 앞두고 판공성사를 드리던 중 고해소에서 정신을 잃어 사무장님께 업혀 병원으로 옮겨져 6시간 만에 깨어나 멋적게 사제관으로 돌아와 『휴- 사제생활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7일 동안 16곳 공소 판공, 5일 동안 14구역 판공 3천 명 이상 성사 봄)하며 새 신부로서 사제생활은 많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성탄 자정미사 후 썰물처럼 교우들은 가정으로 돌아간 텅빈 사제관에서 책장 높이 올려 놓았던 어머님이 주신 상자가 모처럼 만에 눈에 띄어 문득 부모님과 가족 생각이 나서 열어 보니 새끼 펠리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앞가슴이 피투성이가 된 펠리칸 새가 그려진 상본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섯 상자 중에서 제일 먼저 열어 본 상자 안의 페리칸 상본! 어머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셨겠습니까?…
보좌신부 4개월 3일 만에 첫 본당신부로 부임(75년 3월 17일)한 시골 본당…. 신학생 때나 눈코 뜰 사이없이 바쁜 보좌신부 생활 속에서 틈틈이 그려 보던 본당신부! 부임한 후 공소 26곳 방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장마를 맞았습니다.
성당과 사제관을 지은 지 20년이 넘었지만 보수공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시골 성당이기에 이곳저곳에 뚝, 여기저기서 찰랑찰랑하는 소리가 밤이면 더욱 크게 들려옴은 물론 의자 하나 제대로 놓고 앉을 자리가 없어 모기장 위에 비닐을 덮어 씌워놓고 한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내가 왔던가!』를 부르며 22년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에 남을 첫 본당신부로서 그래도 좋았던 첫 살림이었습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비닐로 덮어놓고 보니 우습기도 하고 비가 새도 이렇게 샐 수가 있는가? 하다가 문득 어머님이 주신 박스 안에 혹시 꼭 필요할 때 쓰라고 하셨으니 혹시 돈이라도 들어 있지나 않나? (장마가 그치면 곧 보수공사를 해야 하는데…) 하며 열어 보았더니 부모님이 고향집 안방에 모셔 놓았던 적어도 30년이 넘어 보이는 십자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즉시 성당으로 달려가 보니 십자가와 그 아래 모셔 놓은 나무 감실에 똑! 똑! 한 방울 두 방울 빗물이 막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사다리를 놓고 십자가와 감실을 비닐로 덮고 나자마자 좍-! 십자가와 감실을 덮치듯 서너 양동이가 모자랄 정도의 물이 쏟아져 얼떨결에 도망치듯 피하던 일…. 부모님이 모셨던 십자가를 왜 아들 신부에게 주셨는가? 그 깊은 뜻을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1987년 성모 성년을 맞으며 상가 전세 성당으로 분가된 교우 5백96명으로 1987년 성모 성년 기념성전을 성모님께 봉헌한 일은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힘에 겨운 만큼 보람도 컸었습니다.
성모님 동산을 먼저 봉헌해야 하는데…. 또 어머님이 주신 꼭 필요할 때 쓰라는 남은 상자 3개가 궁금하였습니다. 혹시 땅문서라도…하며 열어보니 어머님이 40년 이상 간직하셨던 묵주가 들어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묵주알이 깨진 부분도 손수 이어 쓰시던 묵주로 1백일기도를 시작한 9일이 되던 날 양로원 협력자이신 박 사비나 자매님이 그냥 오셨다고 하시면서 땅문서를 내놓으시어 2백 평 성모님 동산을 9백40만 원으로 넉넉히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내 몸이다. 내 피이다』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주시며 새로운 계약(예수님 편에서 일방적인 사랑의 계약)을 맺게 하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영원히 주시고자 최후 만찬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당신 섭리대로 일방적인 계약(?)을 맺으시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고, 영원한 자녀로 길러 주시고자 계약과 동시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내 놓으시며 먹으라고, 이 예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라시는대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요한 6, 54) 사방으로 흩어질 제자들을 한데 모으시는 사랑의 성사, 사랑의 표징을 주신 예수님을 오늘도 우리를, 당신 백성들을 당신 몸으로 마련된 사랑의 성찬에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저 응답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부모님께서 아들 신부에게 꼭 필요할 때, 아주 힘이 들 때 쓰라고 내 주신 다섯 상자 중에서 이제 남은 것은 두 개뿐입니다. 이제는 하느님 나라에서 힘이 되어 주실 부모님! 특히 어머님! 생전의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며 오늘도 내일도 아들 신부로서 묵주의 기도를 열심히 바치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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