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를 불러 달라고 사람을 들여 보냈다. 둘러 앉았던 군중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밖에서 찾으십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시며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시고 둘러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 31~34)
요셉 신부님! 오랫만에 찾아 뵙게 됐습니다. 지난 해 양로원 후원 협력자 미사에서 뵙고 3개월 만이시지요?··· 자주 연락을 드려야 하는데 혼자 살다 보니(1951년 1·4후퇴 때 9남매를 데리고 월남. 아내는 월남 후 막내 아들 1백일 사흘 전에 병사)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기도 힘이 들고 바쁩니다.
『인생이 길어야 70년, 근력이 좋으면 80년』이라고 하는데 어느덧 나이 팔순이 지났으니 남은 인생과 얼마 되지는 않지만 유산을 정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양로원 후원 협력자를 위한 미사 때(7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 월례미사에 나오셨음) 요셉 신부님의 강론 말씀이 생각나서 (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나아가 하느님과 아내를 만나야지요)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아들과 며느리(9남매) 딸과 사위들이 착해서 매월 궁색하지 않을 만큼의 생활비를 보내 주므로 큰 근심 걱정 없이 그런대로 잘 살고 있습니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합니다만 가진 것은 넉넉하지 않지만 서로서로 의지하고 오손도손 형제간의 사랑을 나누며 사이좋게 지내는 형제들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늘 마음 속에 간직해 온 생각은 뜻 있는 일을 크게 한 번 해 보고 싶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 종합대학교나 재단에 기증하여 장학 재단에 보태는 것이 보람이 있는 일이 아닐까? 아니면 작은 성당 하나는 봉헌할 수 있으니 여러 면으로 힘든 지방 교구에 봉헌할까? 아니면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봉헌할까? 성지 개발에 봉헌할까?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먼저 신부님과 의논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찾아 뵙지를 못했습니다.
며칠 전 제 생일이라고 해서 온 가족이 모였습니다. 아들 다섯에 며느리, 딸 넷에 사위, 손자 손녀··· 일일이 이름도 기억 못할 만큼 많은 52명이 모였습니다. 그동안 제 나름대로 많이 생각했었고 기회를 찾았지만 마땅한 찬스가 없어서 말을 못 했습니다만 이번에는 꼭 말을 해야지···하다가 또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자녀들이 돌아간 후 한 달 계획을 세워 단순한 여행이 아닌 삶의 체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평소 가톨릭 신문 지상에 소개된 신축이나 증개축 성당과 공소, 무의탁 양로원, 고아원, 꽃동네, 오순절 평화의 마을, 라파엘의 집, 라자로 마을, 작은 예수회 등등···. 몸이 성치 않아서 2~3일에 한 곳씩 다니다 보니 한 달 동안 몸은 지치고 피곤했지만 하느님께서 80평생 동안 얼마나 저와 제 자식들을 조건없는 내리 사랑으로 보살펴 주셨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요셉 신부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평소 생각한 대로 크게 한 번 하는 편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큰 보탬은 안 되겠지만 어려운 여려 곳에 익명으로 조금씩이라도 봉헌하는 것이 낫겠습니까? 사제 생활 23년 만에 이렇게 행복한 고민을 한 일은 처음이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새 성당 분당대지금으로 고민하던 참에 안면 몰수하고 한 번 도와주십시오! 말씀 드려 볼까? 아니면 21년 동안 다니고 있는 양로원 운영과, 시설 증개축을 앞두고 있으니 염치 불구하고 말씀 드려 볼까? 불과 몇 초 사이에 정신이 혼미해져 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했습니다만 고개를 흔들어 보며 마지아 할아버님! 할아버님 뜻은 어떻습니까?
큰 용기를 내어 마지아 할아버님의 뜻을 여쭈어 보고 나니 온 몸이 식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 감사합니다! 속 드러나 보이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구해 주셨습니다』(마태 6, 13)라는 기도를 용기를 가지고 할 수 있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 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때에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34~36:40)라고 말할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성경책을 펴 드렸더니 『신부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하시며 마음의 결심을 하셨는지 환한 모습으로 돌아가시던 마지아 할아버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년이 넘었는데도…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을 뿐더러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희한(?)한 사람처럼 보일 마지아 할아버님의 깊은 신앙심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식에게, 핏줄에게 무조건 물려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심지어는 핏줄이 무엇이기에 일곱 살 손주에게 증여세를 물면서까지 부동산을 물려 주었다가 혼난 사람들…. 마치 훔쳐서라도 물려 주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듯 혈안이 되어 편법이라도 쓸 수만 있다면 못할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말은 안 하지만 그저 잘났든 못났든, 관리할 능력이 있든 없든 핏줄이라면 벌벌 떠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요즘 세상에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인가?』(마르 3, 33) 핏줄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는 말인가? 심부름을 간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매몰차게 반문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얀 피가 흐르는 사람처럼….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르 3, 35)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주님! 당신의 말씀을 새겨 듣고, 당신의 말씀 그대로 따를 수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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