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론자-『누구든지 새로(거듭)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를 환생으로 해석하고…
교회-여기서의 「새로 남」은 환생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삶을 의미하고…
◆1. 예수 그리스도는 환생을 가르쳤을까?
환생론자들은 그들의 환생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교 성서에서 환생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환생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 자체를 부정한다. 초대 교회의 주된 사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기쁜 소식과 하느님의 사랑, 은총과 용서의 기쁜 소식에 중점을 두었지 환생을 통한 인간 실현을 전하는 것은 아니었다.
환생론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의 디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나오는 『누구든지 새로(거듭)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를 환생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이 태어남은 환생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로 위로부터(anothen) 태어나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안에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삶을 의미하고 있다.
예수님 스스로 이것을 다시 설명하신다. 디고데모의 몰이해 즉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 속에 들어 갔다가 나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4절)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심으로써 세례성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며 하느님의 나라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업(Karma)에 의한 환생사상을 단호히 부정하신다.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 죄입니까?』라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셨다. 『자기의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 1~5 참조)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소경을 고쳐 주셨다. 우리는 이 에피소드에서 한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자신이 전생에 지은 죄 때문이거나 아니면 부모의 전생의 업에 의한 것이라는 그 당시의 일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환생에 대한 믿음의 반영을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부활을 함으로써 환생을 부정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성서는 히브리의 문화권 안에서 쓰여진 것이지 환생사상을 가진 인도를 배경으로 쓰여지지 않았다. 또한 예수님이 사시던 그 당시의 주된 사상 조류와 일반적인 믿음은 영혼 불멸설이었지 환생론은 아니었다.
◆2.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 구원
모든 인간의 희망을 다루는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인간의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을 제공한다. 하느님의 이 구원 계획에서는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일회적인 지상의 삶 안에서 자기의 실현과 완성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희망하는 것은 지금보다 나은 어떤 다른 장소나 어떤 더 나은 때나 조건 혹은 행복의 상태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며 구원사업의 중심과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에 집중된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의 최종적인 실현과 완성, 그리고 휴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참여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의 부활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환생론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육체」에 대한 관점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체(그리스도를 통해)를 취하여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 오셨으며 그 육체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마지막 날 영광 속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데 기반한다. 성서에서 보여지는 육체의 의미는 또한 육체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총화성 안에서 전인(전체 인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환생론자들이 주장하는 자기 혼자 구원만을 위해 노력하는 폐쇄적 존재와는 달리 세상과 인간에게 개방되어 있는 존재로 살아야 함을 의미하며 개인만의 구원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의 공동체적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에페 2, 8~9 참조)에 의한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인은 일회적인 지상의 삶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의 증여를 통해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충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완전성과 신적 삶에 참여하는 것만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삶에의 참여는 바로 인간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살 때 이 세상에서 벌써 지상적 삶을 초월하는 종말론적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
「종말」, 「에스카토스(Eschatos)」라는 말은 「마지막」이라는 의미보다는 「구원에 대한 현실적인 경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종말론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예수께서 시간적인 역사 속에 다시 들어 온다는 의미보다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가 완성된다는 의미, 즉 이 세상의 모든 것, 시간과 역사가 완성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W·Kasper 참조). 이러한 것은 인간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을 통해 벌써 하느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모든 것 안에 완전히 명백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마지막 날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처벌보다는 희망이다.
◆3. 환생에 대한 현 교회의 입장 표명
그리스도교 교리와 그리스도교의 복음 전파에 도전하고 있는 환생사상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살펴 보면 제2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환생이나 그와 비슷한 용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단지 공의회는 지상에서의 일회적인 삶을 강조하며(히브 9, 27) 주님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 축복 받은 이들과 같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마태 25, 31~46) 명확하게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48 참조).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이 인간의 지상에서의 일회적인 삶을 강조함으로써 환생론자의 사상에 반대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환생사상이 그리스도교의 독트린과는 전혀 상관없는 믿음임을 표명한다. 교황께서는 1992년 5월 27일에 가졌던 신자들과의 만남에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우리에게 「육체로부터의 망명(환생)」을 넘어서게 하며 우리는 주님에 의해 우리에게 부여된 마지막 날의 육신 부활(교회의 신앙 고백에도 나타남)에 의해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천상의 새로운 삶 안에서 개인 자신의 충만한 정체성을 가지고 일어나는 진정한 육신 부활이다. 이것은 다른 육체를 빌려 이 세상에 계속해서 태어나는 환생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교황께서는 또한 회칙 「제3의 천년기」에서 그리스도교의 계시 자체가 환생을 배제하며 인간 완성(완전한 자기 실현)은 바로 영원한 당신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인간에게 오신 하느님 안에서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바로 그리스도교 시간(역사)의 탁월한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그 이유는 창조와 구원의 역사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시간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교리서 (1013번)에서는 환생이란 우리 각자 행위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잃게 하고 있으며 하느님 앞에서의 결정적인 책임감을 잃어 배제시키며 지상의 삶의 의미를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면에서 그리스도교 인간학과 배치된다. 또한 환생론자들은 한 번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그리스도론에 완전히 배치된다. 그러므로 성교회의 환생에 대한 입장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역행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종말론에 관한 현행의 문제점을 다룬 「국제신학위원회」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이 다른 몸을 빌려 계속적으로 태어나는 환생사상은 이 교도에서 태어났고 그리스도교의 성서나 전통에는 완전히 반대되는 사상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환생은 이원론(Dualism)이다. 즉 육신은 단지 영혼이 자기를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지상의 삶이 끝나면 육신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영혼은 다른 육신을 빌려 환생하게 된다. 또한 종말론적인 면에서 보면 환생론자들은 육신 부활과 영원한 단죄를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환생론자들이 자신의 힘에 의해 구원된다는 자체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궁극적인 인간 구원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데서 야기된다.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부정될 때 그리스도교의 교회론이나 성사론 은총론들은 모두 가차 없이 부정되고 만다. 즉 환생론자들은 그리스도교 자체를 부정하고 붕괴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 외에도 환생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사목적 입장 표명은 여러 나라의 주교들의 서간에 나오고 있다. 「망자(죽은 이)에 대한 고려」를 다룬 독일 주교회의(1994)에서는 죽음 후의 인간의 신비로운 삶이란 항상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며 죽음 후에도 한 개인의 정체성(자신이 살았을 때와 같은)은 계속 존재하고 살아 남는다. 육체 부활에 대한 희망의 의미는 환생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영에 의해 변화된 새로운 육체(영체)를 가진다고 언명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른들을 위한 교리, 진리가 당신들을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탈리아 주교회의(1995)에서는 오늘날 특히 서양에 퍼져 있는 환생사상을 해석하면서(1202) 인간의 지상에서의 삶은 아주 짧지만 명백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인간의 삶은 일회적이기 때문에 환생론자들이 주장하는 여러 번의 삶을 통해 자기 정화를 시켜 완전한 상태에 이른다는 이론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항상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정화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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