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는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백50주년을 맞아 서울대교구를 중심으로 성대하게 신앙대회를 가진 바 있다. 그분의 순교 신심을 기리고 오늘 우리 삶을 통해 드러내고자 마련된 신앙대회. 그러나 한 해가 지난 지금 그때의 감동과 다짐, 성과들이 행사와 함께 끝나버린 것이 아닌지 뒤돌아 보게 된다.
본보는 지난해 7월 14일자 18면 「신앙의 명가를 찾아서」를 통해 김대건 신부 이후 첫 사제를 배출한 김선태 신부 가정과 8월 18일자 16면 「김대건 신부 후손들 1백50년 만에 재회」를 게재한 바 있다. 이번에는 한국교회사와 한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대건 신부의 순교신심 못지 않은 신앙을 면면히 지켜 온 종가를 찾았다. 김대건 신부의 신앙 선조와 후손들의 소박하지만 굳건한 신앙적 삶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김대건 신부의 영성은 어떤 것인지 생각게 한다.
"천주께 허원" 동정생활 종가 손은 끊기고…
『현채 할아부지(김대건 신부의 7촌 조카)는 강 할머니와 결혼하고도 방 가운데 물을 떠다 놓구선 살으셨디야. 「나는 천주께 허원을 했으니까 어떡하든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할무니께 노상 그리셨디야. 그래 이레저레 사니까 아기를 안 낳으시고 말았지야. …또 우리 현채 할아부지는 엄나무 방석(가시방석)에 앉아 기도하면서 살았디야. 그런디 손가락 굵기 만한 노끈으로 짠 속옷 같은 동바지(짧은 바지)를 입고 지냈는가벼. 왜냐하면 할아부지가 돌아가서 아부지가 염(대렴) 할 때 보니 노끈으로 짠 동바지 사이로 살이 불쑥불쑥 올라왔드래. 그때 우리 친척들이 「아이구 우리집네 성인 하나 또 있구나」하며 울었드레』라고 증언했다.
무엇이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게 했는가? 말이 동정부부지 혼인 첫날밤부터 한평생을 동정으로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차라리 이 누갈다-유 요한 동정부부와 같이 일찍 순교했더라면 인간적으로 좀 더 쉽게 수긍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더구나 한 종가의 종손으로서 대를 이어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해서 성 김대건 신부의 종가 직계 손은 그 대가 끊기게 되고 양아들로 입적한 7촌 조카 김양배(1858~1943)에 의해 그 맥이 이어지게 된다.
성 김대건 신부 가문의 신앙은 할아버지 택현과 큰 할아버지 종현이 1784년 겨울 명례방에서 김범우로부터 세례를 받음으써 시작된다. 증조부 운조는 두 아들의 영향으로 뒤늦게 입교한다. 이렇듯 운조로부터 시작되는 김대건 신부 종가의 신앙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맞물려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가문의 첫 순교자 세 성인의 신앙 뿌리
운조는 영세한 지 3년 후인 1791년 제사문제로 일어난 신해박해 때부터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한다. 박해를 피해 피난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귀양살이도 하게 된다.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는 운조는 1814년 마침내 7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교한다.
10여 년이란 오랜 감옥 생활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다운 모범을 보여 관리나 옥리들에게 존경과 대우를 받고 옥중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운조는 한국교회, 순교사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더구나 가문의 첫 순교자로서 후에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여 명의 순교자와 3명의 성인을 배출하는 신앙의 뿌리가 된다.
이후 김대건 신부의 큰할아버지 종현은 제광 제명 두 아들을 낳고, 이들은 각각 경식과 제식을 낳고, 또 이들은 각각 현채와 현윤을 두게 된다.
종손인 현채가 동정생활을 함으로써 손이 없게 되자 작은집 7촌 조카인 양배가 양자로 입적돼 대를 잇게 된다.
양배의 친할머니 경주 최씨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1846년 병오박해를 피해 충북 진천에서 살다가 남편 제식과 사별 후 1850년대 초쯤 지금의 변산반도 끝자락 전북 부안군 산내면 불무동에 정착한다.
신심이 깊었던 최씨 할머니는 근처 절 부근에서 숨어 살고 있던 신자들을 모아 불무동을 신자촌으로 만들었는데 1857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 와 성사를 줄 정도의 교세를 일궜다.
성당부터 지어 놓고 신부 보내 달라 간청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의 열심한 신앙을 본받아 수계생활을 착실히 해온 김양배는 이재에도 밝았다. 주로 담배농사와 어업에 의존했지만 배를 이용한 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모으고 기반을 잡게 된다.
박해가 끝나면서 내륙으로 나가 농사를 짓기 위해 지금의 등용리 일대 갈대밭을 사 모으게 되는 김양배는 이곳에 친척과 교우들을 불러들여 개척하는데 1903년에는 15가구 50여 명의 신자가 거주하는 교우촌이 형성됐다.
그러나 1894년 동학난을 맞아 또다시 피난을 가게 되고 얼마 후 돌아와 정착하게 되는 김양배는 사랑과 믿음으로 어려운 교우들을 구제하면서 한편으로 신부를 모실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마침내 1918년 8월 2일 20평의 성당과 8평의 사제관을 건축하고 그해 12월 11일 드망즈 주교의 주례로 성모칠고를 주보로 모시고 성당 봉헌식을 갖게 된다.
얼마나 신심이 돈독하고 신부 모시기를 염원했으면 본당이 설립되기도 전에, 사목할 신부가 파견되기는 고사하고 계획도 없는 상황에서 성당부터 지었을까?
이 때의 일을 드망즈 주교는 일기에서 「매우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적고 있다. 성당도 아름다웠겠지만 심심산골 외진 곳에 성당을 짓고 신부 모시기를 염원한 신자들의 정성이 더욱 아름다웠으리라.
아무튼 일부터 저질러 놓은 김양배와 그의 일가 그리고 등용리 신자들은 신부를 모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펼치게 된다. 당시는 서울교구와 대구교구로만 나눠진 상황이라 신부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대구 주교관을 몇 번이나 왕래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1924년 11월 8일 드망즈 주교가 사목 방문차 등룡리에 왔을 때 김양배와 신자들은 본당 신부를 임명해 주도록 간곡히 요청한다.
마침내 1926년 5월 30일 지난해 선종한 대구대교구 이기수 몬시뇰이 초대신부로 파견되면서 본당의 역사가 시작된다.
부안본당 71년 역사 중 김 신부 집안서 36년 회장
오늘날 부안본당(주임=박진량 신부)의 모체가 되는 등룡리본당은 설립 당시 신자 수가 5백여 명이나 되었다. 초대 회장은 당연히 김양배가 맡게 되고 부안 읍내로 옮겨 가기까지 9년 동안 실질적인 본당 운영의 짐을 지게 된다. 김양배의 손자 용태(마지아ㆍ76세)씨가 부안본당 회장을 27년 했으니 71년의 본당 역사 중 36년이란 세월동안 성 김대건 신부의 종가에서 본당 살림을 꾸려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등룡리본당은 너무나 외진 곳에 위치하고 주변이 교우촌으로 둘러싸여 더 이상 발전을 할 수 없었다. 이에 이기수 신부는 부안 읍내로 성당을 옮기기로 하고 1935년 지금의 문화원 자리로 첫 이사를 하게 된다. 물론 김양배의 마음은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부안성당은 1961년 현재의 위치로 또 한 번 이사를 하게 된다. 이때 신자들은 큰 가마솥에 끓인 밀가루 죽을 먹어 가며 성당 짓기에 전념을 다하게 된다. 특히 등룡리 공소 신자들은 자갈을 채취하여 20~30리 길을 등짐으로 나르고 밤이 깊어서야 학생들은 호롱불 밑에서 숙제를 하고 어른들은 집안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일제 우민정책에 맞서 신자ㆍ빈민학교 설립
한편 김양배는 일제 식민시대의 암울한 민족사 속에서 고민하여 일본의 우민정책에 맞서 신앙인과 빈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사업에도 남다른 정성을 쏟게 된다.
이미 1902년 불무동 시절 학교를 개설, 3명의 학생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1932년에는 등룡리본당 차원에서 4년제 간이학교인 「등룡리 학술강습소」를 설립하고 60여 명을 교육시키게 된다.
김양배의 둘째 아들 종기(요셉)가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온 학습소는 일제의 탄압으로 9년 만에, 후에 설립된 부안본당의 간이학교와 함께 문을 닫게 된다.
실지로 간이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해 온 김종기는 당시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은(전주농고 1회 졸업) 사람이었다. 그는 교육사업 외에도 마을에 고동 양돈장을 설치하고 뽕나무를 심게 해 등룡리를 군내 모범 부락으로 표창을 받게 하는 등 신앙공동체의 모범을 보여 교세 확장에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50년대 초에는 2천4백여 평의 논과 5천여 평의 산을 교회에 기증해 공소와 본당의 재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신앙과 동네 지키기 위해 빨치산과 성전(聖戰) 치르기도
김양배는 종락 종기 두 아들을 두었다. 종락은 병태 경태 윤태 용태 영태 준태 여섯 아들을 두었으나 현재 살아 있는 아들은 부안본당 회장을 27년이나 지낸 김용태씨 뿐이다.
이들 형제들은 할아버지 양배와 삼촌 종기, 부친 종락을 중심으로 등룡리를 이끌어 가는 젊은 층의 중심이 된다.
6.25를 맞아 신앙과 동네를 지키기 위해 지하 공작대까지 조직하지만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빨치산의 출현으로 성전을 치렀던 이들은 집과 공소가 일부 불 타고 몇몇 동네 청년들이 순교하는 어려운 고비도 넘겨야 했다.
김용태씨는 이후 1951년부터 77년까지 27년간 부안본당 회장으로 어려운 시기의 본당 살림을 꾸려 오면서 변산반도 골짜기에 5개의 공소를 설립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등룡리 공소는 경태의 아들로서 장손 병태의 양자로 입적된 영수씨가 지키고 있다. 김영수씨 또한 공소 회장이자 공소에서 시작한 신협 이사장으로, 그리고 우리 밀 생산자 위원회 부안군 대표로서 신앙과 사회생활에 있어 김대건 신부 종가의 종손 역할을 충분히 다해 오고 있다. 특히 부인 김정인(데레사ㆍ60세)씨는 남편 될 사람이 천주교 신자라는 말에 끌려 시집 온 후 자신은 물론 친정집 식구 모두를 입교시키는 등 종부로서 모범과 희생을 보여 왔다.
한편 김대건 신부의 종가에서만 1명의 신부와 3명의 수녀가 났다. 양배의 동생 경배의 직계 손인 전주교구 김정태 신부(영국 유학 중)와 양배의 딸 김안나 수녀, 그리고 김영수 회장의 여동생과 딸인 김영자(루시아)와 김미혜(비타리스)가 국제 가톨릭 형제회에 소속되어 있다.
이로써 지금까지 밝혀진 김대건 신부 가문의 성직ㆍ수도자 수는 김대건 신부를 포함, 김대건 신부의 삼촌 제철의 직계 손인 대전교구 쌍용동 주임 김선태 신부 등 3명의 신부와 3명의 수녀 등 모두 6명이다. 그리고 김선태 신부의 세 동생이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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