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은 60년 만에 돌아오는 흑룡의 해! 좋은 윤달입니다.’
올해 부모님 산소의 이장을 고려하고 있는 이 요셉(55·서울 ㅎ 본당)씨. 지난해부터 준비하던 이장 문제와 관련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윤달이 들어 있는 2012년에 이장을 해야 한다고 권유하자 ‘윤달 같은 것을 따지는 것은 미신이 아닐까’ 잠시 생각했으나 본당 연령회장님까지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조언하기에 결국 올해로 이장을 미뤘다. 이장 업체에서 보내온 안내문의 ‘좋은 윤달’이라는 문구를 보며 ‘미루기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다소 안심이 됐다. ‘부모님께 좋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미신이 아닐까’라는 염려 면에서 이리저리 개운치 않았던 터. 뭔가 해답을 얻은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손 없는 날’ 이사를 하라?
직장 문제로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안 테레사(28·대구 ㄷ 본당)씨는 아직 미혼이기도 해서 이사가 잦은 편이다. 이사를 할 때면 달력에 이사할 날짜의 ‘손 없는 날’ 표시를 확인한다. 비록 손 없는 날에는 이사 비용이 비싸지만, 그래야 우환이 없다는 주위의 권유 때문이다. 신자로서 다소 마음에 걸리는 일이기도 해서 고해성사를 보기도 했지만 다시 이사를 앞둔 입장에서 이사 날짜를 잡아야 하는데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손 없는 날을 무시하자니 왠지 불안하다.
오늘의 일진(日辰)은?
신년 운세보기는 심심풀이다?
권 루카(36·수원 ㅂ 본당)씨는 스마트폰으로 아침 출근길, 뉴스 정보를 확인하며 ‘오늘의 일진’ 즉 운세도 빠짐없이 챙긴다. 역술 상담 등의 부제가 붙어있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운세를 한 번 살펴봄으로써 하루 생활을 한 번 살펴본다는 의미다. 점집을 찾는 것은 신자로서 금해야 할 일이지만, 하루 일과를 점검한다는 의미에서 또 심심풀이라는 점에서 신문에 게재된 오늘의 운세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 미신을 좇는 신앙인들
2012년 올해는 보통 3년에 한 번(정확하게는 19년에 7회) 찾아오는 윤년(閏年)이다. 또 양력 4월 21일부터 5월 20일까지는 윤달이다.
최근 한 일간지는 삼베마을로 유명한 충청도 한 지역에 수의 제작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윤달에 수의(壽衣)를 마련하면 무병장수한다”는 속설로 인해 수의 주문이 증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격대도 평소보다 높아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장례업체들도 윤달을 앞둔 장례 마케팅이 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의업체의 경우 이미 몇 달 전부터 예약이 줄을 이어 대부분 업체가 이미 윤달에 일할 물량을 모두 확보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각 시·군 관련 부서에 따르면 분묘 개장(改葬) 신고 역시 급증하고 있다. 이장, 합장은 물론 윤달을 기해 조상의 유골을 화장, 납골당에 안치시키려는 사람들이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월 중 손 없는 날로 여겨지는 20~21일에는 이사를 하려해도 예약을 할 수가 없다. 입학철을 앞둔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외의 이사수요도 넘치기 때문이다. 업체들은 20~30% 정도 비용이 올라감에도 많은 이들이 손 없는 날에만 이사를 하려한다고 전했다.
토정비결을 포함해 주역·사주·별자리 운세·타로점·혈액형 점 등 운세를 점치는 방법을 알려주는 간판은 인터넷에서 혹은 거리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역술을 직업으로 삼는 이는 3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예로부터 내려져 오는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생활 안에 스며들어 있는 ‘윤달’과 ‘손 없는 날’ 그리고 역학·무속신앙의 범주로 포장되면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사주’·‘궁합’·‘운세보기’ 등은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가톨릭신문이 지난 2007년 창간 80주년에 실시한 ‘가톨릭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조사에 따르면 영세 후 토정비결을 본 경험에 대해 신자들의 11%가 ‘여러 번 있었다’고 답했고 30.1%는 ‘한 두 번 있었다’고 응답했다. 전체 신자 중 41.1%가 영세 후 한 번 이상 토정비결을 보았다는 결론이다.
또 택일·작명·궁합 등의 경험에서도 25.5%가 ‘한 번 이상’이라고 답했다. 4명 중 1명은 민간신앙을 접하고 있다는 뜻이다.
토정비결을 본 경험에 관한 설문에서도 1987년 6.3%, 1998년 6.5%와 비교할 때 2006년에는 11%로 뚜렷이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점·택일·작명·궁합을 본 경험에서도 이전의 조사와 비교할 때 그 추세가 뚜렷이 증가하는 모습을 드러내, 민간 신앙과의 접촉 경험이 증가했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민간 신앙 영역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점차 침투하고 있다는 의미다.
토정비결이나 사주·궁합 등 민간 신앙을 접한 이들의 심리적 배경에는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는 인식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 본당 내에서도 토정비결의 경우 비교적 종교성이 없거나 극히 낮은 것으로 인식하는 신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2005년 대전교구가 실시한 ‘새 복음화를 위한 조사 연구’에서 28.5%가 ‘점 보는 것을 나쁘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응답한 것에서도 그 같은 우려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손 없는 날’, ‘윤달’등에 대한 기대는 이 요셉씨나 안 테레사씨의 사례에서처럼 역술이나 사주 점 등의 행위보다 더욱 자주 주위에서 목격할 수 있는 생활 속 미신 행위라 볼 수 있다.
‘귀신이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아무런 액운이 없는 날’이라는 의미의 ‘손 없는 날’이나 ‘지상의 모든 신들이 인간사를 관장하지 않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다’고 해서 손 없는 달, 또는 무탈(無)한 달로 여기는 ‘윤달’의 의미는 결국 그 의미처럼 귀신의 활동 여부에 맞춰진다.
윤달·윤년에 대한 신봉은 ‘원래 없는 날이기 때문에 귀신이 모르는 날’이라는 설명에서 출발한다. 즉 평상시에 귀신이 알면 노여움을 살 수 있는 집의 수리와 이사·묘단장 등 궂은 일들을 이 시기에 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일선 사목자들은 “하느님이 만드신 것은 모두 좋은 것이고 그런 면에서 시간도 세월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니 근본적으로 선한 것인데, 인간적인 생각에서 귀신의 활동 반경에 따라 어느 날이 좋고 덜 좋고 하는 것은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 부족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의정부교구의 한 본당 사목자는 “윤달, 손 없는 날, 사주풀이 등 미신적인 행위들이 생활 전반에 깊숙이 젖어 있어 많은 신자들이 그것이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관습인지도 모르는 채 당연히 따라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하면서 “교육을 통해 의식을 바꾸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며 미신을 포함한 기복신앙과 관련한 신학적 입장 정리가 시급한 것 같다”고 의견을 밝혔다.
▲ 사주·궁합 등을 본다는 점집은 주변에 많고 신자들 중에도 특별한 죄책감 없이 점집을 찾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는 가톨릭교회 교리서 내용처럼, 신앙인들은 민간 신앙이 품고 있는 종교성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만 한다.
■ 미신은 신앙 순수성을 훼손
미신은 어떤 초인간적 힘을 인정하여 인생의 생사길흉(生死吉凶)이 이 힘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교회적 입장에서 이러한 미신 행위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 부족과 신뢰심 부족에서 행해지는 것이며, 이는 또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 또는 배반을 초래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116항은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 사탄이나 마귀에게 의뢰하는 것,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 ‘미래를 꿰뚫어 본다’고 하는 그릇된 추측 등이 그러한 예이다. 탄생 별자리를 믿는 것, 점성술, 손금, 전조(前兆)와 운명에 대한 해석, 환시, 점쟁이(무당)에게 물어보는 일 등에는 시간과 역사 나아가서는 인간까지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능력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당연히 하느님 한 분께만 드려야 하는, 사랑의 경외심이 포함된 영예와 존경을 거스른 것이다”고 명시한다.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장 유경촌 신부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만을 믿고 바라며 끝까지 인내와 사랑으로써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서 “이러한 관점에서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는 미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맡겨드리고 이에 대한 불건전한 호기심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 미신은 어떤 초인간적 힘을 인정하여 인생의 생사길흉이 이 힘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고 믿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하느님께 드려야 할 경외와 존경을 거스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