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관련 러시아 문헌 연구의 권위자인 모스크바대학교 박종효(바오로·모스크바 한인본당) 교수가 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했다.
박종효 교수는 1995년부터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여러 학회를 통해 안중근 관련 러시아 보고서 내용 일부를 발표해 왔으나, 일반인들에게는 그 내용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8.15 광복절을 맞아 안중근 저격 당시 현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했던 러시아 재무장관 까깝쵸프의「이토 후작 살해사건 보고서」내용을 박종효 교수로부터 들어 보았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의거를 가장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는 문서는 러시아 재무장관 까깝쵸프가 작성한「이토 후작 살해사건」보고서이다.
까깝쵸프는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영접한 장본인으로 안중근의 의거를 가장 생생하게 목격한 증인이다.
제정러시아 대외정책 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는「이토 후작 살해사건」문서에는 까깝쵸프가 러시아 황제에게 직접 작성한 총 1백76쪽의 비밀전보로 이토의 하얼빈 방문 목적,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입장할 수 있었던 배경, 저격 위치, 이토의 저격 후 처음 한 말, 절명 후 처리 과정, 러시아 측이 안중근을 일본 측에 넘긴 법적 근거 등이 잘 보고돼 있다.
◆이토의 하얼빈 방문 목적
박종효 교수에 따르면 당시 아무런 관직이 없었으나 일본 내의 친러시아파 정객이었던 이토가 러시아 재무장관 까깝쵸프의 회담 주요 의제는 러일전쟁 후 일본의 한국합병과 러시아의 몽고 통치 문제였다고 한다.
이토가 한국 신문 등에 만주에 낚시와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기기 위해 간다고 발표했고, 러시아에는 공식적인 회담 의제로「러일전 후 일본 측 관할이 된 중국 남부철도와 러시아 측 관할인 중국 동부철도간에 상호 화물인도 협정」을 내건 것은 연막에 불과한 것이라고 박 교수는 말한다.
이후 일본은 1910년 한국을 합방하고, 러시아는 합병 승인 대가로 1913년 몽고를 얻는다.
◆안중근 의사가 어떻게 하얼빈역에 잠입할 수 있었나
「이토 후작 살해사건」문서에 따르면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가미가 일본인에 한해서는 일체의 통행증이나 증명 검사를 피해 달라고 요청해 안중근이 경계를 뚫고 저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까깝쵸프가 직접 쓴 보고문을 인용하면『중국 동부철도 당국은 만일의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2일 전 24일 일본 총영사 가와가미에게 일본인 환영객은 어떤 사람들이며, 무슨 비표 통행증을 발행할 것인가 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가와가미는 일본인은 무조건 통행시키라고 요청했다.
범인(안중근 의사를 칭함) 의 외모와 복장은 일본인과 똑같았다. 유럽인과 중국인의 입장은 통제했다』라고 적고 있다.
◆의거 당시 상황
이토의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한 것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정각이었다. 러시아 북경 주재 대사 까라스또베치가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보고서를 보면 재무장관 까깝쵸프는 미리 와 대기 중인 자기 열차에서 내려 동행한 재무부 수행원들을 대동, 영접하러 이또를 찾아가 차안에서 20여 분간 환담을 나누었다. 이들은 열차에서 내려 군 부대장들과 인사를 나누고 아물군관구 의장대의 사열을 받고, 재외 영사들과 인사를 교환했다.
그리고 이토는 처음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서서 다섯 발자국도 못 왔을 때 안중근이 의장대 뒷편에 서 있는 일본 교민들 사이에서 급히 의장대의 전령 장교와 사병들을 밀고 나와 이토 후작에게 권총으로 3발을 명중시켰다.
안중근은 주위의 장교들에 의해 바로 목과 손이 붙잡혔지만, 손을 내리지 않고 다시 일본 관방청 비서 모리, 남만철도 관리소장 다나까, 하얼빈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가미에게 1발씩 3발을 명중시켰다.
권총 6발을 다 발사한 안중근은『만세 까레야』라고 외쳤다. 보고서에 따르면 안중근은 목과 팔이 잡힌 상태에도 냉정하제 일본 관료들에게만 조준 사격을 해 러시아인의 피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적고 있다.
◆이토의 유언과 시신 처리 과정
총격을 받은 이토는 안중근의『만세 까레야』라는 말을 듣고 처음 한 말이 바로, 『물론, 물론』 이었다고「이토 후작 살해사건」보고서는 적고 있다.
그가 한국인으로부터 언젠가 저격당할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총상을 입은 이토는 까깝쵸프 장관에게 몸을 의탁했고, 국경수비대 장교들이 달려와 이토의 양팔을 끼고 특별열차 안으로 옮겼다.
이토는 폐와 간에 총상을 입었고, 세 발의 실탄 중 제1발은 이토의 전박, 제2발은 폐장, 제3발은 복강을 관통했다.
안중근이 사용한 권총은 부라우닝 6연발 권총이라고 이 보고서는 적고 있다.
이토는 또 몹시 고통을 호소해 의사가 꼬냑을 칵테일해 마시게 했고, 『누가 권총을 쏘았는가』물은 뒤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한 채 20분만에 절명했다고 한다.
◆안 의사가 일본 측에 넘겨진 법적 근거
안중근은 체포된 후 러시아 관헌을 따라 검찰 밀렐 앞으로 인도됐다. 첫 신문 과정에서 안중근은 가톨릭 신자임을 밝히고『이토를 죽이기 위해 하얼빈에 단독으로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까깝쵸프 장관은『분명히 조직적인 한국인 음모단의 소행이다. 차이차고역에서 철도 경찰은 3명의 한국인을 체포하고 범인과 똑같은 부라우닝 권총을 압수했다.
이들에게 이토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이들은 러시아 당국에 이토 살해단의 일원이라고 자백하고 전날 밤에 차이차고역에 왔다고 했다. 살인자 (안중근) 는 다수가 가담한 이토 살해단의 일원이다』고 보고했다.
까깝쵸프는 또『국경지방재판소 검사와 합의, 살인자는 한국 국적을 소유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일본법이 적용됨으로 모든 사건은 일본 총영사관에 넘겨질 것』이라고 보고했다.
러시아가 일본과의 우호 관계만을 고려, 한국의 독립 의지를 용인하지 않고 안중근을 일본에 넘긴 것이다.
◆한· 중· 러 · 일의 반응
러시아 : 친러파 이토의 저격은 모든 러시아인에게 충격을 주었고 당국자들은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될까봐 신속히 안중근 의사 일행을 일본에 넘겼다. 또 사건의 책임은 일본인에 대한 통행 자유를 요청한 일본공사 가와가미에게 돌리고, 러시아 북경대사 등을 조문 사절로 파견했다.
중국 : 하얼빈역 현장에 있던 중국 관원들은 사건이 발생하자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비록 독립운동이라고는 할 지라도 국구로 온 귀빈을 사살한 것은 용인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내심 기뻐했다.
일본 : 이토의 시체가 일본에 도착하는 날 한 일본 신문은 재일 한국인을 3일간 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천황은 이토의 아들에게 공작 칭호를 내렸다. 일본은 또 이 기회를 활용, 한국의 탄압과 합방을 더욱 구체화했다.
한국 :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사모아의 보고에 따르면 전 황제인 고종은 점심을 들다가 이토 살해 소식을 들었고 조의금 10만 엔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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