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진주」라 불리며 동서간 교착지로, 동ㆍ서 문화가 절묘하게 융화된 독특한 사회적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세계인의 관심을 모았던 홍콩. 그 홍콩이 본래의 땅인 중국령이 된지도 두 달이 되어 간다.
갖가지 추측과 예상들이 난무했던 홍콩 반환 이후의 상황은 그러나 이러한 관심들이 무색할만큼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경제도 활황 기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고 홍콩 주민들의 표정에서도 앞날에 대한 걱정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가끔씩 북경 정부의 의중을 담은 듯한 홍콩특별행정구 수반 둥첸화의 발언에 홍콩과 세계가 귀를 세울뿐 별다른 돌출 상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태로라면 중국 정부가 약속한 50년간의 일국양제(一國兩制), 홍콩의 자치는 과연 탄탄대로일 수 있을 것인가.
홍콩의 오늘
중국 남부 광동성 동남부 해안에 위치해 있는 홍콩은 제주도의 약 3/5 정도의 크기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홍콩은 크게 홍콩섬과 까오룽(구룡), 2차 북경조약 때 영국령이 된 신제(신계)로 구분된다. 면적은 1천95평방 킬로미터. 인구는 96년도 말 현재 6백42만1천3백 명이다.
홍콩은 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거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인구 밀도는 1평방킬로미터 당 평균 5천9백90명이나 된다. 이 같은 인구 밀도는 홍콩섬과 까오룽, 신제지역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또 이곳은 세계에서 임대료가 가장 비싼 상업 도시로도 유명하다. 세계 유수의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고,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기업 활동이 보장되는 곳이기도 하다.
홍콩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광과 쇼핑. 한 해 홍콩을 찾는 관광객은 1천만 명이 넘는다. 이들이 뿌리고 가는 돈은 90억 달러에 이른다. 지난 95년 「한국 방문의 해」에 3백75만 명이 한국을 찾아 55억 달러를 쓰고 간 것에 비기면 관광은 과연 홍콩의 알짜산업이라 할 만하다.
1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2층 전차, 오션파크(해양공원)의 수족관, 한 번에 6천만 명을 수용하는 중국 레스토랑 오션시티와 수상식당 점보, 세계 최대의 나이트클럽인 B보스, 홍콩섬의 야경 등이 홍콩의 명물로 사람들을 당기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홍콩의 관광자원으로 첫 손에 꼽히는 것은 쇼핑이다. 자동차와 화장품, 술과 담배를 제외한 모든 상품을 면세로 수입해 온 홍콩은 도시 전체가 거대한 쇼핑센터다.
홍콩의 언론
홍콩은 「언론 천국」으로서도 독특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홍콩은 「언론 바벨탑」이라고 불리웠다. 인구 6백만 명에 59종의 신문과 6백여 개의 잡지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신문 구독자가 10명당 6명꼴로 일인당 신문 구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영어와 광동어 TV 채널에다 아시아 최초의 위성방송인 「스타TV」도 이곳이 본거지다.
그러나 언론들의 앞날은 그리 밝지 못하다. 날로 치열해지는 생존경쟁과 중국 정부의 언론통제 때문이다. 홍콩의 언론들은 이미 중국 정부를 의식, 중국과 홍콩의 장래에 대한 자극적인 보도를 자제하고 있으며, 여론을 자극하는 논평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홍콩 언론이 중국 집권 엘리트의 시녀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심각하게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인당 국민소득 2만3천 달러로 아시아에선 일본과 싱가포르를 제치고 3위를 기록한 국제 도시 홍콩. 아시아의 제2 금융시장과 세계 5대 외한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홍콩. 「사회주의 속의 자본주의」라는 초유의 시험대에 선 홍콩의 장래는 이래저래 괸심을 모으고 있다.
영욕의 세월 150년
1840년 6월 1차 아편전쟁에서부터 1997년 7월 1일 중국 반환까지 홍콩의 156년은 영욕이 교차하는 역사였다.
「동방의 진주」로 불리운 홍콩은 1840년대 광둥(광동)으로 가는 베트남산 향나무를 부리던 인구 3천여 명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1840년 영국 제국주의가 일으킨 아편전쟁의 희생양으로 영국에 할양되면서 세계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홍콩섬의 할양을 규정한 것이 난징(남경)조약이다. 청조의 무력함을 간파한 영국은 이후 애로우호 임검 수색을 트집 잡아 군대를 파견, 까오룽(구룡)을 넘겨 받았다. 1899년엔 수도 북경까지 쳐들어가 2차 북경조약을 맺어 신제(신계) 및 2백여 부속 도서를 99년간 조차하는데 성공했다.
홍콩은 이후 영국의 아시아 침탈 교두보로, 중국 민족주의의 본거지로, 그리고 급속한 경제 발전의 모델 지역으로 환골탈퇴하면서 영욕의 현장이 되었다.
1984년 9월 26일 북경 인민대회당. 영국과 중국의 고위 관리들이 배석한 가운데 양국의 총리는 97년 7월 1일 홍콩의 중국 반환과 50년간의 자치를 약속한 협정 문서에 서명했다.
난징조약 후 1백40년만의 대좌였다.
『공산주의 체제와 중국 외교의 승리』를 자축하는 중국과 식민 지배의 종식을 아쉬워하는 영국, 두 나라간 힘 겨루기가 암암리에 계속돼 온 가운데 지난 7월 1일 0시, 홍콩에 대한 영국의 식민 지배는 종지부를 찍었다.
홍콩의 종교
홍콩 내 종교별 신도 수 현황 - 도교:4백만 명(추산) 불교:70만 천주교:25민 개신교:25만 회교:5만 힌두교:1만2천
홍콩은 동-서양을 망라한 종교의 전시장이라 불릴만 하다. 도교와 불교,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과 힌두교가 공존한다. 다민족 사회인 홍콩의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가장 보편적인 종교는 도교와 불교다. 인구의 85%가 이에 속한다. 19세기 중반에 전래된 천주교와 개신교의 신도는 각각 25만 명 내외. 이들은 70년대 빈곤과 부정부패 퇴치에 앞장섰고, 지금은 인권 수호를 추구하는 홍콩의 야심 세력이다.
중국은 특히 천주교 등 종교 세력이 지난 90년대 초 동구 사회주의 와해에 기여했다는 점을 의식, 이들이 정치 세력으로 변할 가능성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홍콩은 1841년 4월 22일 주변 6개 도서 지방과 함께 마카오교구에서 독립된 포교지로 설정됐다.
책임자로는 당시 마카오의 교황청 포교성 성대리인인 스위스 출신의 테오도르 조셋 신부가 임명됐다. 이듬해 1월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소속 미카엘 나바로 신부가 가톨릭 성직자로선 최초로 홍콩에 부임했으며, 그해 3월 조셋 신부가 다른 몇 명의 신부들과 함께 부임해 본격적인 홍콩 사목을 시작했다.
이후 1874년 11월 17일 교구 체제인 홍콩대목구로 설정됐고, 책임자로는 레이몬디 신부가 임명됐다(레이몬디 신부는 며칠 후인 11월 22일 주교에 임명된다). 이후 1946년 3월 1일 정식 교구로 승격됐으며, 발토르타 주교가 초대 교구장에 임명돼 48년 10월 31일 착좌식을 가졌다.
1969년 5월 29일 프랑시스 쳉펭휴 주교가 홍콩인으론 처음으로 제3대 교구장에 임명돼 10월 26일 착좌식을 가졌다.
지금의 세례자 요한 우쳉충 추기경은 1975년 4월 5일 제5대 홍콩교구장 주교에, 지난 88년 5월 9일 추기경에 임명됐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