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께 데려와서 그에게 안수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불러내서 손가락을 귀에 넣어 들을 수 있도록 뚫어주십니다. 이어서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에타파!」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귀머거리는 예수님께 달아 들었기 때문에 그의 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귀가 제대로 열리기 위해선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귀가 열린다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의 것을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어 합니다. 즉 듣지 않아도 될 것에는 귀가 지나치게 밝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할 교리와 복음의 메시지에는 귀가 어둡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육신 사정에는 날래나 영신 사정에는 둔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교리서를 읽어도 무슨 소린지 잘 모릅니다. 그나마 예비자 교리교육 때 6개월간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 당시에 배운 내용이란 신앙상의 안내 말씀 정도에 불과한 것인데, 그나마도 영세한 지 몇 년이 지나다 보니 다 잊어버렸습니다. 왜 우리가 교리책을 멀리하게 될까요? 다른 책과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책은 한 번 눈으로 보면 그만입니다만 교리서나 복음서는 읽은 다음 반드시 묵상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묵상을 전혀 안 하니 귀가 뚫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죠. 묵상이 뒤따라야만 귀가 열린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둘째로, 소경처럼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고해성사 때 받은 보속이니까 마지 못해 성경을 읽거나, 마음의 준비 없이 건성으로 읽는다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잠이 안 올 때 수면제 대용으로 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귀가 열려 있으면 외국 말이라도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라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말씀하시기 전에 『들을 귀 있는 자는 알아 들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처럼 들을 귀를 가지라고 세례예식 때에도 귀를 만지는 「에타파」 예식을 거행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입에 십자표도 그어줍니다.
셋째로, 귀를 열어야 들을 수 있으며 신앙은 들음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잘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서 10, 17에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뒷걸음질 치는 사람」에 대한 말씀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0, 38에 『나를 믿는 올바른 사람은 믿음으로 살리라. 만일 그가 뒤로 물러서면 내 마음이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리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청하면서 귀기울여 들을 때 주님의 말씀이 내게 와 닿을 것입니다. 요즘 「열린 음악회」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돼서 그런지 「열린」이란 이름을 붙인 각종 프로그램이 많아졌습니다. 학교 연구수업도 「열린 교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눈도 열린 눈, 귀도 열린 귀, 마음도 「열린 마음」이 중요합니다. 이 좋은 독서의 계절에 우리는 교리서나 성경책을 열린 눈, 열린 귀, 열린 마음으로 읽어봅시다. 우리 국민들은 책을 잘 안 읽는다고 합니다. 기껏 읽어도 별 것 아닌 주간 잡지류를 많이 읽는답니다. 학교 교육이 끝나면 책하고 굳바이입니다. 왜 그럴까요? 학교 교육이 평생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입시니 뭐니 너무 지겹도록 책과 씨름하게 만들어 놨기 때문에, 책이라면 이가 갈려서 꼴도 보기 싫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교육 제도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아는 것이 힘」이라던데 공부 안 하는 국민으로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실린 성서나 교회서적까지 멀리해서야 되겠습니까?
넷째로, 사람들은 예수님께 안수해 주기를 청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손을 귀에 넣는 동작과 침(입 안에서 나오는)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입니다. 의식을 무조건 형식주의라고 비판하며 안수만을 인정하는 프로테스탄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구절입니다. 성사를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판단해선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어봅시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마태오 13. 12 이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려주시는 분들, 특히 주일학교 교사들, 전교에 힘쓰시는 모든 분들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마음 안에 와 닿도록, 그래서 내 안에 자리잡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오늘 미사 중에 은혜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꾸준히 주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은혜를 청합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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