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의 마지막 교란인 기묘박해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한불조약으로 이 땅의 천주교가 종교 자유를 얻던 바로 그 해 1879년 8월 한여름에 경기도 평택과 충청도 공주 일대에서 가해진 기묘박해는 3명의 순교자를 탄생시키고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러나 마지막 촛불이 더 자신의 불꽃을 밝히듯 이 땅의 천주교에 대한 마지막 박해는 더없이 처절했다. 가톨릭신문은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신자들의 뇌리는 물론 역사 속에서마저 잊혀졌던 「기묘박해 순교자」을 발굴,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소개한다.
성명 출신지 거주지 순교일 비고
김덕빈(바오로) 청양 청산 공주 공수원 새터 1879년 8월경 23세로 질울의 배명중(바오로)와 교류함
이용헌(이시도르) 예산 덕산 ″ ″ 21세로 자는 사윤
이병교(레오) 서울 서소문 ″ ″ 67세로 자는 덕경, 드게트 신부의 복사 이경빈의 부친
오랫동안 계속된 박해로 인해 한국 천주교회는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위시한 성직자들을 잃게 되었고, 많은 신자들이 희생됨으로써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박해 직전 2만3천 명에 이르던 신자 수는 1만 명 정도로 줄었으며, 중국으로 피신한 프랑스 선교사들 중에서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이복명) 주교만이 중국의 요동 반도 챠쿠에 있는 성모설지전 성당에 머무르면서 조선에 입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리델 주교는 조선 선교사 블랑(백규삼) 신부와 드게트(최동진) 신부를 만나 1876년 5월 8일에 그들을 황해도로 잠입시킬 수 있었다. 바로 이들이 대 박해 이후 다시 조선 땅을 밟게 된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이어 리델 주교도 1877년 9월 23일에는 두세(정가미) 신부와 로베르(김보록)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었고, 1879년 9월 7일에는 드게트 신부도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이에 앞서 드게트 신부는 리델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게 되자,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를 떠나 충청도 공주의 공수원 새터(공주군 우성면 용봉리)에 새로 매입해 놓은 이병교(레오)의 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방문했던 교우촌과 신자들로부터 얻은 기쁨을 다음과 같이 파리 본부에 보고하였다.
『이 나라를 두루 여행한다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박해를 자초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온전히 천주님께 의탁하면서 망설이지 않고 길을 떠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1천5백 명 가량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렇게 한 다음 귀가 길에 테데움을 기쁘게 불렀습니다.』
드게트 신부가 우려했던 것처럼 새로운 박해의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박해는 드게트 신부가 공주 새터에서 휴식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된 1879년(기묘년) 5월 16일 배교자 최우돌의 밀고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배교자 최우돌은 이미 1878년부터 드게트 신부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 포졸들과 함께 공주 인근의 교우촌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그 결과 많은 남녀 교우들과 아이들이 공주 감영에 투옥되었고, 그 중에서도 드게트 신부와 중요한 네 사람은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드게트 신부는 체포된 후 약 3개월 여를 옥중에서 있었는데, 앞서 탈출한 교우가 두 명이었으므로 같은 옥에는 공주의 신자 네 명과 평택에서 체포된 신자 한 명 등 모두 다섯 명이 있었다. 드게크 신부는 그들 중 네 명이 문초를 받고 아사한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명은 이미 배교한 뒤였고, 김덕빈(바오로), 이용헌(이시도르), 이병교(레오) 세 명만이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순교 장면에 대해 드게트 신부는 훗날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는 신자들에게 매일 주는 음식의 양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몹시 분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한여름의 더위 속에 통풍도 안 되고, 언제나 발목엔 쇠사슬을 차고, 그곳에 들끓는 벌레들에게 시달리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감옥 생활은 얼마나 혐오스럽고 얼마나 지루한 것입니까? 그것은 얼마나 길고 얼마나 아름다운 순교입니까?
어느 날 나는 그들이 굶주림으로 희생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었는지 나는 기겁을 하여 물러섰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니고, 비참과 기아, 그리고 무서운 문둥병 같은 것으로 완전히 변해 버린 산 송장들이요, 진짜 해골들이었습니다.
그날 우연히 방안에서 바람을 쐬러 나온 교우들 몇 명을 작은 구멍으로 보았는데, 특히 내 복사 이경빈의 아버지인 이병교(레오)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때가 1879년 8월이었다. 한편 공주 옥에 갇혀 있던 남녀 신자들과 어린이들은 1880년 2월 10일에 모두 석방되었으니,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가 맞이한 최후의 기묘박해였다. 이 박해로 김덕빈(바오로), 이용헌(이시도르), 이병교(레오) 등 세 명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마지막 순교자로 기록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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