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청야의 정산 땅은 대대로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켜 온 순교자들의 신앙 터전이었다. 칠갑산 자락을 뒤로 하고, 그 너머는 청양 땅, 남쪽은 금강, 북쪽은 차령 산맥 줄기에 가려져 있는 협소한 지역이지만, 바로 이러한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박해 시대의 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피신처가 되었다. 내포평야에 전파된 복음의 줄기가 일찍부터 손길을 뻗친 곳도 바로 이 지역이었다.
이러한 정산의 신앙 배경은 김씨 집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66년의 병인대박해로 인해 정산의 교우들 또한 곳곳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용기는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군삼(필립보)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필립보는 복음을 받아들인 후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를 가르쳤고, 함께 수계생활을 해나갔다. 그 중에서도 맏아들 김덕빈(바오로)은 본성이 순량한 데다가 밝은 교리를 먹고 자라면서 장차 하느님의 종으로 간택될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질울(정안면 공성리)에 살던 배명중(바오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부모님을 봉양하면서 동생들과 함께 십계와 천주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전히 박해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그들 가족은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가 없어 이웃의 공주 땅 새터(우성면 용봉리)로 이주를 해야만 하였다.
새터는 이처럼 박해를 피해 모여든 교우들이 새로 일군 교우촌이었다. 그 이웃은 모두 외교인들이 사는 마을이었지만, 교우들이 비밀히 생활하였던 탓에 오랫동안 발각되지 않고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교우들은 목자가 없는 가운데서도 열심히 교리를 배우고 실천해 나갔으며, 언젠가는 다시 양떼를 찾아 목자가 오게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박해가 누그러지기 시작하였고, 이내 그리던 목자가 다시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이 이곳 새터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이에 필립보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은 장차 목자를 맞이해 들일 수 있도록 새로 집을 장만하였는데, 때마침 박해를 피해 다니던 드게트(최 빅토리노) 신부가 경기도 안성을 거쳐 새터로 피신해 오게 되었다.
김덕빈 바오로는 당시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드게트 신부가 새터에 오자 그 복사인 이경빈, 동료 이경헌(이시도르) 등과 함께 신부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고, 고해성사를 받은 후에는「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목자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당시로서 이러한 그의 결심은 순교에 대한 열망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 길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열리게 되었으니, 열흘 뒤인 1879년 5월 16일(음력 윤 3월 26일)에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새터 교우촌으로 포졸들이 들이닥치게 된 것이다.
모든 마을 사람들은 놀라움과 비탄 속에서 대부분 체포되었다. 이때 바오로의 부친 필립보도 밭에서 일을 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바오로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오로는 자신과의 약속대로 목자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원하여 포졸들에게 나아가 신자임을 고백하였다.
포졸들은 체포한 교우들을 일단 공주 감영으로 끌고 가서 문초를 하고 형벌을 가하였다. 그런 다음 드게트 신부를 비롯하여 남자 교우 다섯만은 서울로 압송해 가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행이 서울로 끌려가던 도중에 바오로의 부친 필립보는 산을 넘으면서 포졸들의 감시와 소홀해진 틈을 타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 모두는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5월 21일(음력4월1일), 포도대장은 옥에 갇혀 있던 교우들을 불러 내다가 문초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바오로는 세 번이나 문초를 받았지만 한결같이 배교하기를 거부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미 부모로부터 참된 성교를 배워 그 진리를 실천해 왔는데, 어찌 감히 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관장님께서 어떠한 말로 유혹하거나 협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비록 장하에 죽을지언정 성교를 버리거나 우리 주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화가 난 포도대장은 바오로를 다시 옥으로 끌고 가서 마실 물도 주지 말라고 사령들에게 엄명하였다. 좁은 감옥 안, 더위, 우글거리는 벌레들, 발목의 쇠사슬, 그리고 가장 참기 어려운 갈증과 굶주림이 앞에 놓여 있었지만, 순교를 각오한 바오로에게는 이것이 진정 영광으로 가는 길로 생각되었다.
그런 기간이 약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바오로는 이제 해골과 같이 말라 산송장이 되었지만, 그것은 이 동정순교자가 맞이해야만 했던 세속에서의 마지막 행로였다. 실로 길고도 아름다운 한여름의 순교! 그때가 1879년 8월경으로, 바오로의 나이 겨우 23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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