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십자가와 성모상 등 가톨릭 성물이 최초로 도입된 시기는 현재 문헌상으로 볼 때 소현세자 때였다.
1963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인조와 청 태종에서 항복하자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갔던 소현세자는 북경으로 거처를 옮긴 후 예수회 아담 샬 신부와 교분을 통해오다 1644년 말 귀국할 때 그로부터 십자고상과 천주교 서적 등을 선물 받고 조선에 가져왔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성물들이 국내에 반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의 중국 왕래 때부터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는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재입국할 때 많은 종교서적과 성물을 받아 왔을 것이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가 바로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소재한「여사울 이존창(루도비코ㆍ1752~1801) 생가터」에서 발굴된「출토품」이다.
1969년 6월 18일 현재 교포사목 중인 구자오 신부의 주도로 발굴된「여사울 이존창 생가터 출토품」은 십자가 1점, 묵주패 3점, 성해통 1점 등이다. 이들 출토품 모두는 1801년 신유박해 전후 시기에 중국에서 제작돼 반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자들은 여사울 출토품이 이존창이 자신의 집에서 교우들과 함께 하는 공식 전례 예절때와 예비자들을 교리 교육할 때 사용하다 신유박해로 그가 체포되기 직전, 성물 훼손과 압수를 방지하기 위해 아궁이나 땅 속에 몰래 숨겨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품 중 가로 7cm, 세로 15cm의 철제 십자가는 예수상 아래에 해골이 조각돼 있는 것이 이채롭다.
또 성해통 안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상(무염시태상)이 정교하게 부조돼 있으며 묵주 3점 중 2점은 묵주알은 모두 없어졌고 쇠줄과 성모패만이 남아 있다. 나머지 1백여 년간 지속된 박해의 풍상을 웅변해 주고 있다.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 출토품은 발굴 당시 비록 심하게 부패되고 원형이 훼손돼 있었지만 한국교회 초기 신앙선조들이 사용했던 유물로서, 또한 한국인 신자가 가져온 첫 성물로 추정되는 귀중한 것이어서 한국 천주교회의 보물 중 하나로 지정돼도 마땅할 것이다.
이들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 출토품은 현대 서울 합정동「절두산 순교기념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한편「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은 권일신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워 영세했고, 초기 가성직단의 일원으로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복음 선교의 기틀을 마련한 순교자이다. 김대건 신부의 일가도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했다.
이존창은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성직자 영입을 위해 윤유일, 지황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에 파견,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배교한 바 있는 그는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더더욱 전교에 힘쓰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돼 공주 황새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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