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이므로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어떤 책에 십자가에 관한 이런 얘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 주님은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를 하나씩 내주면서,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하신 다음 자취를 감추셨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 하면서 뒤처져 따라 왔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 드렸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아들아, 아주 잘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다. 도착한 두 번째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고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그런데도 앞 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맸다는 말씀입니까?』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 놓은 너에게 있으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어준 거야.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거지.』
두 번째 이야기. 한 사내가 죽어서 영혼이 연옥으로 끌려갔다. 천사가 이끄는 대로 들판으로 나가보니 거대한 십자가 더미 하나가 나타났다. 천사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천당으로 데려가자면, 먼저 그대가 이 십자가들을 저 멀리 보이는 언덕까지 모조리 옮겨 놓아야만 하오.』 사내는 낙담하여 고개를 흔들었다. 십자가는 엄청나게 많은데다, 옮겨놓아야 할 언덕도 까마득히 멀어 보였다. 게다가 십자가는 한 번에 하나씩 밖에는 옮길 수가 없으니 일을 빨리 끝내자면 오랜 세월이 걸릴 판이었다. 사내가 불만을 토로했다. 『도무지 모르겠군요. 나는 지상에 있으면서 그런대로 훌륭한 삶을 살았고 질 십자가도 다 졌다고요. 그런데 여기 와서 이 많은 십자가를 또 져야 한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대답했다. 『사실 그대가 훌륭한 삶을 살았고 져야 할 십자가를 다 졌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 못 할 거요. 하지만 선생, 이 십자가들은 그대가 지상에 있을 때 불만을 토로한 바로 그 십자가들이오. 그대가 불만 속에 걸머진 십자가는 이 곳 연옥으로 넘어와 그대가 죽은 후에 다시 한 번 걸머지도록 되어 있는 거라오.』 천사의 말을 들은 사내는 그제야 알아듣고서 거대한 십자가 더미에서 십자가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지상에 있을 때 이 모든 십자가를 불평하지 않고서 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십자가는 원래 사람을 처형하던 도구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자 그 후로 십자가는 치욕적인 죽음의 도구가 아니라, 인류의 속죄를 위한 희생 제단, 죽음과 지옥에 대한 승리,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서 당하는 고통 등을 상징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ㆍ24)고 가르치셨고, 사도 바오로도 서간에서 십자가의 신비를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성녀 헬레나는 345년 골고타에서 예수님의 2명의 도둑과 함께 못 박혔던 3개의 십자가를 발견하였다. 아들 황제 콘스탄틴 대제에게 요청하여 이를 안치할 부활 성당을 예루살렘에 건축하게 되는데 그 봉헌식 날이 335년 9월 14일이었다. 그 후 페르샤에게 점령당해 오다가 이를 629년 로마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페르샤인들에게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탈환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9월 14일에 열게 되었다. 787년 제2차 니체아 공의회에서 십자가 공경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의 예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수반되는 모든 고통을 우리는 달게 져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왜 따르는가? 그분의 약속 말씀대로 영생을 따내기 위해서이다. 그분의 부활하신 하느님의 생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가진 길을 그대로 따라 가야 한다. 수난-죽음-부활의 길을 말이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큰 일일수록 책임도 막중하고 따르는 희생도 큰 법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 받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구원이 바로 십자가에 걸려 있는 것이다. 잘 신앙해 오다가 게으름 때문에, 세속 일 때문에, 제 탓으로 구원이 말짱 헛 것이 된다면 얼마나 억울한가? 이제까지 들어간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 밑지는 장사 하지 말지어다. 더 이상 한 눈 팔지 말고 앞으로도 잘 살아 보자.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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