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들은 언제나 같은 용기를 갖고 있는 동료들이 있었기에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들의 용기는 천상으로 이어지는 끈이 되어 서로를 얽어 놓았으며, 세속의 그 누구도 이것을 풀 수가 없었다. 기묘박해의 순교자 김덕빈(바오로) 또한 이병교(레오)와 이용헌(이시도르)이라는 출중한 신앙의 동반자를 얻을 수 있었으니, 옥중 생활의 괴로움도 진정한 나눔 안에서는 괴로움이 아니었다.
드게트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던 이경빈의 부친이던 이병교(레오)는 체포될 당시에 이미 67세가 된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힘은 그에게 체포와 서울로의 압송, 옥중에서의 굶주림과 고통을 이겨내도록 하였다. 1879년 8월, 포도청 옥에서 마지막으로 순교자들을 볼 수 있었던 드게트 신부는 그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아! 내 복사의 아버지인 레오가 아직까지 살아 있었구나』라고 마음으로 이야기하였다. 이 말은 한편으로 반가움의 표시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교에 대한 분명한 증언이기도 하였다.
서울의 서소문 밖 수레골(차동) 태생인 레오는 자를 덕경이라고 하였는데, 아주 어렸을 적에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거듭되면서 고향을 떠나 충주, 내포, 진잠으로 피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마침내는 공주 새터 교우촌에 정착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는 내포지방에 거주하는 동안 다블뤼 주교를 만나 세례를 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며, 「다시 박해가 일어나 체포될 경우에는 신앙을 증거하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
그 후 레오는 아들 경빈을 드게트 신부의 복사로 들여보냈다. 뿐만 아니라 드게트 신부가 강원도 지역에서 경기도 지역으로 내려오자 교우들과 함께 돈을 모아 용인 공수골에 신부댁을 마련하였으며, 이후로는 서로 연락을 취하며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1878년 벽두에 리델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새터까지 들려왔다. 박해의 풍문에 놀라고, 목자가 처한 위험에 생각이 미치게 되자 한없이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교우들과 의논하여 새로 거처를 마련한 뒤에 드게트 신부를 모셔왔다. 이 때 그를 도와 일한 젊은이가 바로 이용헌(이시도르)이었다.
충청도 덕산 출신인 이시도르는 자를 사윤이라고 하였으며, 일찍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그 신앙의 분위기 안에서 자라났다. 그의 고조부는 초기의 박해를 겪은 뒤 고향을 떠나 경상도로 이주해 살았으며, 증조부는 다시 가족들과 함께 전라도 고산으로 피해 살다가 1827년의 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또 그의 조부는 경기도 양성으로 이주해 살던 중에 1839년의 박해로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순교자 집안에서 자라난 이시도르 또한 일찍부터 교회 서적을 가까이 하였고, 성인들의 행적을 가슴에 새기면서 순교할 원의를 품게 되었다. 또 어느 교우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 『앞으로 체포될 경우에는 굳센 마음으로 위주(爲主)하여 죽는 것이 구령(救靈)에 가장 좋은 일이다』라고 가족들에게 말하곤 하였다. 그러므로 1879년 5월 16일, 새터 교우촌에 가해진 박해로 드게트 신부와 여러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자, 이시도르는 결코 두려워하는 모양이 없이 즐겁게 말하며, 포졸들이 음식을 주면 『우리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먹는 것일 터이니 많이 먹자』고 하면서 교우들을 권면하였다.
천주께서는 마침내 레오와 이시도르의 원의를 들어 주셨다. 공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좌포도청에 갇히게 된 그들은 세 차례에 걸쳐 형벌과 문초를 받게 되자, 세속의 모든 유혹을 거절하고 마음에 담고 있던 신앙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글을 좀 알고 있던 레오는 포도대장의 질문에 천주경ㆍ성모경 등 20여 종에 이르는 기도문을 이야기하면서 그 내용이 얼마나 참된 것인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 둘은 진정 신앙의 끈으로 묶여진 순교의 동반자였다. 문초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한결같이 『신앙의 참된 교리를 잘 알고 있으며, 천당과 지옥 또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매를 맞아 만 번을 죽을지언정 배교를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증거하였다. 그럼 다음 석 달을 옥에 갇혀 있으면서 부자처럼 지냈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굶주림으로 인해 옥사하고 말았으니, 이 때 이시도르의 나이 겨우 21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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