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표는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몰 연월일, 행적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푯말이나 푯돌을 말한다. 그러나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묘표를 무덤 앞에 보이게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순교자의 무덤을 후세에 길이 확인시키기 위해 묘표를 관과 함께 묻는 지혜를 발휘했다. 물론 순교자의 무덤들은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고 묘표는 신자들이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사기 그릇을 주로 사용했다.
순교자들의 묘표 중 현재 그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은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와 그의 딸 성녀 이정희 발바라의 묘표이다.
이 두 묘표 사발은 1938년 9월 27일 경기도 시흥군 북면 봉천리에서 이장하면서 묻었던 것으로 1968년 서울 언구비(현재 잠실에 있는 동네) 묘지에서 발굴됐다.
성녀 허계임 막달레나의 묘표는 지름 15cm 크기의 사발로 「복녀 허 막다리나 1839년 치명, 1938년 9월 27일 시흥군 봉천리에서 이장」이라고 적혀 있다.
성녀 이정희 발바라의 묘표 역시 「복녀 허 막다리나 녀식 복녀 리 발바라. 1839년 치명, 1938년 9월 27일 시흥군 북면 봉천리에서 이장」이라고 기록돼 있으며 사발의 지름은 17.7cm이다.
현재 서울 합정동 절두산 순교기념관 성당 지하 묘소에 유해가 안치돼 있는 허계임ㆍ이정희 성녀는 모녀간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 모두 순교한 분이다.
허계임 성녀는 경기도 봉천의 이씨 집안의 성을 가진 외교인과 결혼한 뒤 중년에 이르러 시누이 이매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이정희, 영희 두 딸과 함께 입교했다.
1839년 3월 성사를 받으러 상경하여 시누이와 두 딸이 사는 집에 머무르고 있던 중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 두 딸, 김성임, 김 루시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이들과 함께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했다.
이들 중 허계임과 둘째 딸 성녀 이영희 막달레나가 1839년 7월 20일 서소문에서 참수형을 받아 먼저 순교했고, 다음으로 이정희 발바라가 9월 3일 서소문에서 마지막으로 허계임이 9월 26일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 순교했다.
이들 세 모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성인품에 올랐다.
한편 묘표 사발이 출토된 곳은 허계임 묘 외에도 순교 동정부부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와 그의 가족들의 묘소에서도 발굴된 바 있다.
또한 김범우의 묘에는 십자가 형태의 돌 무더기를 묘표로 사용해 흥미를 끌기도 했다.
허계임, 이정희 모녀는 묘표는 비록 1938년 9월 묘를 이장하면서 묻은 비교적 연대가 짧은 묘표이지만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무덤에 사용했던 관습 그대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한국 천주교회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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