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리라. 하느님의 사랑에서 힘을 받으며 사랑하는 일에 몸 바치는 많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두드려 보리라. 열릴 때까지!
『사랑의 사업은 평화의 사업이다』(Works of Love are Works of Peace)
캘커타의 데레사 수녀님 장례식장 중앙 뒤편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장례식장 안팎을 가득 메운 사람들, 각 종교 대표들, 국가 대표들, 데레사 수녀님이 사랑했던 가난한 이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의 대표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고별의 기도를 올리는 그 현장을 설명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데레사 수녀님이 한국을 처음 방문하셨던 1981년 5월, 그분을 모시고 다니며 통역을 했었다는 인연때문에 수녀님의 장례식 위성중계를 하는 방송실에서 무려 다섯 시간을 갇혀 있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수녀님을 뵙지 못하고 캘커타에는 가 본 일도 없었기에 그분의 장례식 위성중계를 위해서는 별 도움이 못 될 것이라고 사양했으나 피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같은 수도자로서 그분을 대할 때 나의 내면에서 받게 되는 도전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 때문에 피하고 싶었다.
힘의 원천은 하는님 사랑
데레사 수녀님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1970년대 초에 나와 한 반에서 공부를 하던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로 인해 수녀님을 로마에서 처음 뵈었었다. 그 후에 수녀회 총원장들의 국제연합 회의와 아시아 수녀연합 회의장 등에서 수녀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 때문에 한국방문 시에도 모시고 다니며 통역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캘커타의 데레사 수녀님의 기억은 「그분과의 만남」들이 내 마음 안에 남겨 주는 「강한 도전」들이 너무 커서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장례식을 지켜보면서도 내 마음은 장례식 장면을 떠나 우리나라 휴전선 근처에서 망연히 오락가락하고 있음을 몇 번이나 의식하고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특히 인류가 원하는 평화도 사랑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데레사 수녀님은 삶과 죽음으로 증거하셨다.
세계 1백19개 나라에서 5백70여 개 「사랑의 집」들을 세우고 수녀님들과 수사들이 봉사자들과 하나되어 온 세계에서 보내오는 후원자들의 지지와 도움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거기에는 국경도 인종도 종교의 차이도 없다. 데레사 수녀님은 하느님 사랑, 예수님 사랑에서 힘을 받아 하느님 섬기는 마음으로 사랑했고, 하느님 사랑 안에 세계는 하나가 된 것이다.
「세상의 평화」 그것은 수녀님께서도 얼마나 바랐던 사실인가!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됨을 깨닫고 서로 사랑하며 아버지의 식탁에 마주 앉을 수 있는 날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셨던가!
1988년으로 기억한다. 내가 가톨릭대학 성가병원에서 일할 때였다.
사랑의 선교회 한국분원을 오신 홍콩관구의 수련장 수녀라고 기억한다. 병원을 찾아와서 데레사 수녀님께서 보내는 것이라고 하며 루르드의 성모 기적패 40개를 전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 수녀는 나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 주었다. 데레사 수녀님이 루르드에 순례기도를 갔을 때, 어떤 분이 수녀님께 도움을 드리고 싶은 데 무엇을 원하시는가 여쭈었다고 한다. 수녀님은 그 때 기적의 패를 한 번에 1천 개씩 수녀님이 원할 때마다 부쳐주면 고맙겠다고 했고 그분은 그것을 부쳐 주었다. 수녀님은 그 패들을 받아 들고 특별기도를 바친 다음, 은인들이나 특별히 회개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보내 드린다고 했다.
수녀님이 러시아에 초청을 받아 간 것은 나에게 패가 전해지던 그 직전이었던 것 같다. 모스크바에 초청되어 간 수녀님은 고르바쵸프와 고위급 인사들 50여 명에게 손수 기적의 패를 옷에다 달아 드렸다고 하면서 그들이 반드시 회개할 것이라고 했다. 그 후에 놀랍게도 러시아가 변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제일 먼저 기억한 것은 데레사 수녀님의 모스크바 방문과 그 「기적의 패」였다. 그리고는 또 잊고 있었다. 그런데 수녀님의 장례식장에서 다시 수녀님의 그 「믿음」과 그 「용기」그리고 그 「기적」이 나의 심금을 강타하는 것이었다.
데레사 수녀님이 세 번째 한국을 방문했을 때라고 기억한다. 세상의 모든 나라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던 데레사 수녀님이 갈 수 없는 나라 북한이 바라보이는 휴전선까지 가셨다. 기도를 하시고 바로 그 기적의 패 몇 개를 임진강에 던지고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드리시오 그러면 열릴 것이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세상은 분명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사랑을 거부한 곳에서 수많은 어린이와 서민들이 굶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강 하나 건너, 산 넘어 몇 시간 안에 발이 닿을 곳에서 가난과 주림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형제자매들을 두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아파만 하고 있다. 그들 속에 뛰어 들어 함께 아픔을 나누고, 힘을 합쳐 일어설 수 없는 현실에서 쌀 포대 몇 개, 라면 몇 봉지를 몰래 밀어넣는 아픔은 눈물겹도록 커져만 가고 있다.
북녘의 하늘을 응시하는 내 마음 속에 데레사 수녀님의 다정하면서도 힘찬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레오날드 수녀님, 수녀님의 바로 앞에서, 옆에서 신음하는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보십시오. 나는 그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갈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갈 수 없지만 두드리십시오. 열릴 것입니다』
마음 구석구석에 경종을 울리는 수녀님의 음성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숨어서 나와 우리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을 깨워 일으켜 줄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방송실에서 풀려나는 마음은 무겁고 답답하기만 하다.
기도하리라. 하느님의 사랑에 힘을 받으며 사랑하는 일에 몸바치는 많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두드려 보리라. 열릴 때까지!
1997.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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