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월 19일 세계 선교의 날을 기해서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를 교회박사로 선포한다. 교황은 소화 데레사 수녀를 일러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의 사랑에 봉헌하고 온전히 그분 사랑 안에 살았으며 매일의 생활 안에서 형제적 사랑을 단순함 가운데에 실천할 줄 알았던 젊은 가르멜 수녀』라고 부르며 『아기 예수의 데레사와 함께 우리 자신을 동정 마리아께로 향하도록 하자』고 권고했다. 24세의 짧은 생애 속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완벽한 삶을 살았던 성녀 데레사. 그 향기로운 삶, 세속적인 온갖 유혹을 기꺼이 떠나 자신의 「작은 길」을 따라 하느님께로 걸어간 성녀의 생애와 영성을 3회에 걸쳐 되짚어본다.
소화 데레사, 아기 예수와 성안의 성녀 데레사로 흔히 불리는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1873년 1월 2일 프랑스 알랑쏭에서 루이 마르탱과 젤리 게랭의 아홉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리 프랑스와 즈 테레즈 마르탱.
누구나 그렇듯이 성녀의 생애와 수도자로서의 삶에는 깊은 신심을 갖고 있던 부모로부터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마치 오누이처럼 다정한 결혼 생활을 했던 성녀의 양친은 원래 두 사람 모두 수도생활을 원했으나 여의치 않아 세속에서 수도자처럼 깊이있는 신앙생활을 했다.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도 두 사람은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해 영성체를 했으며 사순시기에는 빠짐없이 단식과 소재를 지켰다. 당시 이 같은 의무를 완화했던 교회법이 제정되자 「이는 훌륭한 신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여전히 엄한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데레사는 자서전에서 가르멜에 입회하기 전까지 생애를 세 시기로 구분한다. 첫 시기는 1877년 8월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고향에서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둘째 시기는 자신이 「시련의 겨울」이라고 부른 리지외로 이사한 후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혹독한 세심증에 시달리던 1885년까지의 8년간, 그리고 1888년까지 깊은 내적 회심의 경험을 통해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기까지의 시기가 세 번째이다.
어머니의 죽음 후 모든 가족은 리지외로 이사를 했고 명랑했던 데레사는 극도로 수줍음을 타는 소녀로 변했다. 리지외 베네딕도 수녀원 기숙학교에 들어간 데레사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는 스스럼없이 모든 일에 임했지만 집을 나서면 지나치게 수줍어 해서 다른 동료들로부터도 많은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대단히 열심히 공부했고 빼어난 성적을 보였다. 특히 종교 과목에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 거의 없어 학교에 상주하던 한 신부는 그를 「작은 박사」라고 불렀다. 세심증으로 고통 받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공부뿐만 아니라 생활과 신앙에서도 그 나이의 어린이로서는 놀라울 만큼 조숙함과 자기 절제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결점을 충분히 인식한 그는 그런 고통조차도 침묵 중에 받아들였고 결코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가 첫 영성체를 한 것이 1884년 5월. 성녀는 첫 영성체 석 달 전부터 작은 수첩에 예수님을 위해 행한 희생과 작은 사랑의 행위들을 매일 저녁 적어 나갔다. 석 달 동안 희생 8백18번, 사랑의 행위나 지향은 2천7백33번이었다.
그 해 건강이 악화된 성녀는 학교를 떠나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성녀는 천국과 영원을 생각하면서 이미 오래 전부터 꿈꿔온 수도생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가 열 살 때인 1883년의 경험은 그녀의 일생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때 성녀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석 달 동안 심하게 앓았다. 이를 두고 성녀는 자서전에서 「악마가 그녀의 외적인 면에 세력을 뻗쳤다」고 적었다. 경련과 환각을 일으켰고 의식을 잃기도 해 그녀는 자신이 그 병으로 죽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성녀를 진료한 의사조차도 『이런 현상 앞에서는 과학도 무력하다』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언니들과 함께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바치던 중 성모 마리아의 현시를 목격하게 되고 4~5분 동안 계속된 환시 끝에 데레사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그 후 3년 뒤인 1886년 성탄전야 미사 직후 겪은 「완전한 회심」의 체험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다.
14살이 되던 해 마침내 성녀는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기를 청했다. 성녀는 수도생활을 주로 영혼들을 구원하는 수단으로 생각해 선교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극기와 자기 희생을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을 구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가르멜 안에 갇혀 살도록 결정하게 만들었다.
원래 성녀의 수도생활에 대한 열망은 아주 어릴 때부터 간직돼 있었다. 어릴 때부터 성녀는 하느님께 자유롭게 기도하기 위해 사막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자서전에서 쓴 바와 같이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가면 그녀는 혼자 떨어져서 영원을 생각하곤 했다. 수녀원에 들어간 언니들을 보면서 수도생활에 대한 열망은 커졌고 9살이 되던 해부터는 스스로 가르멜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데레사 성녀가 가르멜 수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여기에 찬성한 사람은 오직 당시 가르멜 수녀로 후에 원장을 지낸 예수의 아녜스뿐이었다. 단 한 가지 이유는 성녀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수녀회에서도 그가 21세기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통보했다.
겨우 아버지를 설득한 성녀는 교구 주교에게 그녀가 수녀회에 입회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했고 로마를 순례하면서 교황 레오 13세에게 개인적으로 수녀원 입회가 가능하도록 청하기도 했다. 이 때 교황은 『그래 그래 하느님께서 원하면 들어가게 될 테지』라고 대답했다.
열렬한 지향으로 입회를 희망한 성녀에게 이 같은 장벽은 큰 시련이었다. 하지만 성녀는 여기에서도 완전한 순명의 자세를 보인다. 『이것은 정말 큰 시련이지만 나는 아기 예수님의 작은 공이 아니겠어요? 아기 예수님께서 당신의 장난감을 부수어 버리신다 해도 그것 또한 당신의 자유이십니다. 그래요, 참으로 나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원해요』
결국 그녀는 1888년 4월 9일 15세의 어린 나이로 리지외의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한다.
그 후 24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9년반 동안의 수도원 생활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직책에 충실했다. 수도원의 규칙에 충실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이행했으며 기도생활에 전념했다. 그래서 그녀가 하느님과 이룬 특별한 관계는 자서전이 출판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1893년 수련장 서리로 임명된 데레사는 4년간 직무를 수행하는데 이 시기 그녀는 「작은 길」이라고 부르는 고유한 영성을 바탕으로 수도생활을 했다.
1897년 9월 30일 세상을 떠난 성녀는 이미 죽기 18개월 전부터 결핵을 앓아왔다. 하지만 그는 죽기 얼마 전 병상에 눕기까지 마지막 석 달 동안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평화롭고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혹독한 호흡 곤란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성녀 데레사는 임종 바로 전 십자가를 꼭 부둥켜 안고 아주 힘들게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며 숨을 거뒀다.
성녀가 죽은 지 일년 후 가르멜 수녀회는 성녀의 자서전을 비공식적으로 출판해 여러 가르멜 수녀회에서 읽도록 했고 자서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자 공식적으로 이를 출판했다. 원래 「한 영혼의 이야기」는 책으로 펴낼 계획 없이 언니이자 원장이었던 아녜스 수녀에 대한 순명으로 적은 것이었다. 성녀는 이 원고를 아녜수 수녀에게 선물했고 두 번째 원고는 성심의 마리아 언니, 그리고 세 번째 원고는 이미 병이 매우 심한 상태였던 1897년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에게 주었다. 곧 「한 영혼의 이야기」를 각각 다른 세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때에 썼던 것이다.
이 글들은 편지 형식으로 된 것으로 우아하고 낭만적인 개인적 언어들을 통해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와 일치를 이룬 성녀의 영혼의 순수성과 영적인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출판 후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후 이 책은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됐고 수백만 권 이상이 보급돼 성녀가 세계적으로 공경받는데 기여했다.
24세의 나이로 결핵을 앓으면서 죽기까지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특징 짓는 영혼의 태도, 자신의 「작은 길」을 걸어갔던 데레사 성녀는 당시까지의 교회 관례를 깨고 사후 28년만인 1925년 5월1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됐다.
그리고 평생 로마 외에는 고향인 알랑쏭과 리지외를 떠나 본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함께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돼 스스로 「한 알의 모래」, 「아기 예수님의 작은 공」이라 불렸던 성녀는 전 세계 신앙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성인 중 한 분이 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근 데레사 성녀를 교회박사로 선포할 것이라며 『성녀는 교회 안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시고 그분의 가르침은 가장 뛰어난 가르침들 중 하나로 기억될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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