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재 신부. 조국 근대화의 물결이 막 요동칠 무렵인 1970년. 국내 최대 나환우 집성촌인 성 라자로마을(경기도 안양) 원장에 부임, 기도와 땀방울로 오늘의 「성 라자로마을」을 일구어낸 장본인인 이 신부를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이제 고희를 훌쩍 넘어버린 이 신부가 사제생활 초창기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소화 데레사 성녀와 그가 속했던 가르멜 수녀회와 맺어온 인연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1925년 성인품에 오른 소화 데레사 수녀는 당시 20세기의 성인, 현대의 성인으로 불리며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40년 당시 신학생이던 저희들도 불란서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데레사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무척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아마 성녀를 사모하는 마음이 싹텄었나 봅니다.』.
또 혜화동 신학교 뒤편에 있던 가르멜 수녀원에 늘 복사하러 다니면서 가르멜회와는 더욱 친숙하게 됐다. 『그때 왜 신부님께서 저에게 복사를 시키셨는지 몰라요. 다행히 그 덕분에 그 분위기, 영성에 매료될 수 있는 기회가 됐지요』.
이경재 신부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3일 서품됐다. 서품 후 해군 문관으로 복무하던 이 신부는 당시 해군 인사 참모였던 백기저 대령이 묵호의 기지사령관으로 전임되면서 함께 묵호에 왔다. 이 신부는 이때 그의 일생을 가늠할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백 대령은 신앙이 아주 깊은 사람이었어요. 한데 사령관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백 대령이 쓰러져 거동을 못하는 겁니다. 온 몸이 뻣뻣하게 굳고 위독한 상태가 됐어요. 그때 저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소화 데레사 성녀에게 매달렸어요. 저분을 낫게 해준다면 저의 일생동안 가르멜회에 협조하겠다고 말입니다』.
불과 며칠 후 백 대령은 거짓말처럼 완쾌됐다. 이제 막 사제생활을 시작하려던 이 신부에게 참으로 감사하고도 은혜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신부는 서품 후 첫 세례를 준 간호장교에게도 세례명으로 소화 데레사를 선물했다.
61년 미국생활을 시작한 이 신부는 미국 루이지애나에 위치한 「라 피에떼 가르멜 수녀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 신부와 깊은 영적 교감을 가진 이 수녀회의 25명 봉쇄수녀들을 이 신부를 그들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이 신부의 삶이 곧 수도공동체의 삶이 된 것이다.
이제 이 신부가 원하고 추구하는 것은 곧 이 수도공동체가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였다. 이 신부의 삶 모든 부분에 수녀회가 함께 하겠다는 영적 결합을 뜻하는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루이지애나의 가르멜 수녀회는 그들의 본분인 기도로써 늘 이 신부의 곁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라자로마을을 일구느라 정말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지냈지요. 그러면서도 늘 제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약속이란 「가르멜에 협조하겠다.」는 것.
약속을 지키려는 이 신부의 노력은 87년 9월 그가 가르멜 재속회원으로 서원하면서 드러나기 시작한다. 88년부터는 라자로마을 환우들을 재속회원으로 입회시켰다. 기회가 닿는 대로 전국의 가르멜 수도원을 나환우들과 함께 방문하고 기도를 올렸다.
재속회원이 되면서 라자로마을 공동체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어수선하던 환우들 생활이 정리되고 평온과 기쁨이 배어 나왔다. 때론 통제에 애를 먹던 마을에 평화가 넘쳤다. 이 신부는 『전 세계 가르멜 재속회원 3만여 명 가운데 나환우는 한국이 유일하다』며 자랑한다.
이 신부는 지난해 2미터 높이의 데레사 성녀 상을 제작, 전국 10개 가르멜 수도원에 비치했다. 각 수도원의 성녀상이 제각각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던 것. 조각은 박충 교수(이대)가 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제가 진 빚을 갚았다는 것은 더욱 아니지요. 다만 더 늦기 전에 가르멜회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조금이나마 지킨 것 같다는 위로는 됩니다.』.
생존하는 국내 교구 사제 가운데 가르멜 재속회원은 이경재 신부 혼자다. 이 신부는 매년 사제 서품일을 전후해 부산 가르멜 수녀원에서 개인 피정을 갖는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분주합니까. 라자로마을, 피정의 집, 사제마을 건립 등으로 저 역시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었습니다. 지나온 40여 년의 사제 삶이 참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도 가르멜 영성, 기도의 힘이 없었던들 불가능했겠지요. 제가 한 그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 바로 저 자신과의 싸움이었고, 오늘 제가 있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화 데레사의 삶은 현대인들이 따를 수 있는 참으로 작은 삶이었다.』는 이 신부는 『모든 이들이 그렇지만 특히 사제는 일하는 사제보다는 기도하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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