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학자(doctores ecclesiae)란 교의상 교회에 큰 기여를 한 교회 내의 학자들에게 부여된 칭호이다. 교회학자는 교회 역사상 지금까지 단 32명뿐이며 그 중에는 아우구스티노, 토마스 아퀴나스, 그레고리오 대교황 등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준 수많은 교부들이 포함돼 있어 그 칭호의 무게와 명예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오는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는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가 남긴 학문적 위업, 하느님과의 내적 일치를 이룬 영성의 가치를 쉽게 알 수 있다.
교회학자라는 칭호는 단순히 신앙을 설명하는 능력, 학문적 위업에 따라 부여되는 것만이 아니다. 이 칭호가 부여되기 위해서는 생활의 성성, 탁월한 학식을 갖추어야 하고 교황이나 세계 공의회가 이를 인정하고 공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이는 즉 대상자의 학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신앙의 초자연적인 특성, 곧 성령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뛰어난 통찰력으로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기고 동방교회 신학의 발전에 기틀을 마련한 오리제네스와 같은 대학자도 교회 내에서 영향력은 컸지만 교회학자로 선포되지 않았다.
첫 번째 교회학자가 탄생한 것은 1568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이미 서방교회에서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예로시모, 그레고리오 대교황 등 4명을 일러 사도들과 복음 사가들 다음으로「교회에 뛰어난 학자」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동방교회에서는 대 바실리오, 나치안츠의 그레그리오, 요한 그리소스토모 등 3교부만「공(公)교부」라고 불러 왔는데 라틴교회에서는 여기에 아타나시오를 첨가해 이들 4명을 교회학자로 선포했다.
교황 비오 5세는 이처럼 서방 교부 4명을 교회학자로 승인하고 동방 교부 4명에게 새로이 교회학자라는 칭호를 부여해 성무일도에 삽입했다.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들과 함께 교회학자로 선포됨으로써 모두 9명의 교회학자가 탄생한 것이다.
교부로서「학자」라는 칭호를 받은 경우 그 권위가 특별히 인정되는데 앞서 말한 8대 교부학자의 권위는 더없이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학자의 칭호를 받은 교부로서는 서방교회에서 프와티에의 힐라리오, 베드로 그리솔로고, 레오 대교황, 세빌리아의 이시도로 등이고 동방교회에서는 에프렘, 예루살렘의 치릴로,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등이다.
비오 5세 교황 이후 프란치스꼬회 출신 교황 식스토 5세가 1588년 보나벤투라를 추가한 이후 교회학자는 오랫동안 10명에 머물다가 종교개혁 이후 꾸준하게 늘어 1959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브린디시의 라우렌시오가 교회학자로 선포됨으로써 서방교회 22명, 동방교회 8명 등 모두 30명이었다.
그 중에서 재속 사제는 14명이고 수도자가 16명이다. 또한 이 중 주교가 18명으로 가장 많고 신부가 9명, 교황이 2명 그리고 부제가 1명이다.
그러다가 1970년 아빌라의 데레사와 시에나의 가타리나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여성으로서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학자로 선포됐고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는 따라서 세 번째 여성 교회학자이다.
첫 여성 교회학자로 꼽히는 아빌라의 데레사(1515~1582)는 1614년에 시복, 1622년에 시성됐고 이어 1970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로 선포됐다.
아빌라의 데레사와 함께 교회학자로 선포된 시에나의 가타리나(1347?~1380)는 1461년 시성됐다.
◆가르멜회의 역사와 현황
국내 4개 수도회 활동
「가르멜 남ㆍ녀」「전교 가르멜」「재속회」등
가르멜산의 은수자들로부터 시작된 가르멜회는 크게 봉쇄수도회와 활동수도회로 구분된다. 봉쇄수도회 중에서도 특히 1593년 설립된「맨발의 가르멜회(Order of Discalced Carmelites)」는 O.C.D.라는 약칭을 사용하는데 반해 이에 속하지 않는 경우에는 O Carm이라는 약칭을 사용한다.
현재 국내에 진출한 가르멜 봉쇄수도회는 남녀 모두「맨발의 가르멜회」이다. 관상과 함께 사목 활동을 지향하면서 스페인에서 창설된「전교 가르멜 수녀회 (Carmelite Missionaries)」도 1977년 한국에 진출, 활동하고 있으며 가르멜 제3회도 1948년 첫 모임을 가지면서 한국에서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가르멜회의 기원은 멀리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엘리야가 언제나 가르멜산에서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설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다만 예루살렘 총대주교 성 알베르토(1205~1210)가 제정한 수도회의 첫 규칙서가 13세기 초 수도자들이 엘리야의 우물 근처에 살면서 한 수도원장의 통솔 하에 있었다고 기록한 것을 가장 확실한 증거로 삼고 있다. 이 규칙서는 1226년 교황 호노리노 3세가 회칙으로 인준했다.
현재 전세계 가르멜 회원들은 남자가 4천여 명, 여자가 11만 명에 가깝다.
국내 여자 수도회
한국 진출은 1939년 7월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회 소속의 두 수녀가 내한하면서 시작됐고 이듬해 5월 3명의 수녀가 합류해 5명이 서울 혜화동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1946년 첫 지원자 10명이 입회, 50년 한국 수녀회 창립 10주년을 맞았으나 한국 전쟁으로 거듭된 시련을 겪었다.
그 후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성장을 계속해 1963년 서울 수유리에 수녀원을 신축 이전했고 부산, 대구, 대전, 고성, 충주, 안동 등과 경기도 광주 천진암에도 수녀원을 세웠다.
가르멜 활동수녀회 중 하나로 1860년 스페인 맨발의 가르멜 회원이었던 복자 팔라우 신부에 의해 창설된「전교 가르멜 수녀회」는 1977년 6월 김수환 추기경의 설립 허가에 이어 8월 필리핀 관구 수녀 2명이 입국하면서 한국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 사직동에 유기서원소 겸 지부원, 인천 계산동에 수련원을 두고 있으며 부산 연산동에는 청원소가 있다. 현재 외국인 수녀 4명을 포함해 42명의 서원 수녀가 있고 수련자는 8명이다.
국내 남자 수도회
한국 맨발의 가르멜 남자 수도회는 1974년 9월8일 서울 삼선동에서 창립미사를 갖고 수도자들이 공동생활을 함으로써 시작됐다. 특히 남자 수도회는 외국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이 프랑스에 가서 수련과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스스로 창설한 것이다.
1976년 2월 인천시 북구 계산동 7천2백 평 대지에 수도원을 건립, 78년까지 대성당과 피정의 집을 완공했다. 그 후 성장을 계속해온 수도회는 현재 영국과 로마 등 해외 거주자를 포함해 모두 38명의 수도자가 있고 인천 본원과 마산 수련소, 서울 청원소를 두고 있다.
국내 재속회
재속회인 가르멜 제3회는 1948년 영성 분야의 활동을 중심적으로 하는 가르멜회는 영성신학 연구, 영성사목을 위한 연구와 실천들이 활동의 중추를 이룬다. 한국 가르멜회가 실천하고 연구하는 분야는 영성신학 강의, 영적 지도, 고해성사, 피정 지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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