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의 인물됨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스승과 동료 성직자들의 최 신부에 대한 평은 어떠했을까?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이 청원된 이 시점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최양업 신부와 가까이 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성직자들은 한결같이 최 신부는 「훌륭한 분별력」을 소유한 인물로 평하고 있다.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의 선종 소식을 알브랑 교장신부에게 전하는 서한에서 최양업 신부에 대해 『굳건한 신심과 영원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그의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였다』고 적고 있다.
최양업 신부의 뛰어난 분별력은 언제나 순교자가 되길 원했고, 순교할 기회가 있었지만 유일한 한국인 신부로서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12년간 사목활동을 하면서 순교자적 삶을 산 그의 삶이 증거해주고 있다.
베르뇌 주교는 같은 편지에서 『최 신부는 뛰어난 자질을 가져 몇 해 공부한 것으로 라틴어를 매우 정확하게 말하고 쓰게 됐고 신학 공부를 마친 다음 상해에서 1849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같은 해 조선에 잠입할 수가 있었고,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최양업 신부와 함께 사목 활동을 한 페롱 신부는 최 신부의 죽음을 두고 『하느님께서 불쌍한 조선을 가혹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할 정도로 슬퍼했다.
『최 신부는 제게 어떤 동료 신부보다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제가 조선에 도착한 때부터 우리는 서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제가 그를 존경하는 만큼 그는 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는 저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으므로 저는 그를 잃음으로써 매우 훌륭하고 충실한 친구를 잃었습니다.』
페롱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 신부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입니다. 또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이처럼 동료 성직자들에 있어 최양업 신부의 존재는 한국 신자들의 사목과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베르뇌 주교는 솔직하게 『그의 죽음은 저를 몹시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최양업 신부와 함께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동료 성직자들은 최 신부가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정확히 지키고 서양 선교사들이 다닐 수 없는 어려운 곳을 두루 다니며 성사를 집전, 과로로 선종한 백색의 순교자였음을 기록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