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옷을 입어 추위에 떨고 있던 나를 위해 자신의 코트를 벗어 주던 구주교,… 그분의 따뜻했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려”
57년간 사목생활…선교사로서의 삶은 바로 「십자가의 길」…되뇌는 노사제의 눈엔 이슬이 “촉촉”
40년 홍천서 사목시작…41년 태평양 전쟁 땐 일본군 포로…47년 재입국…50년 6월 28일 인민군에 체포, 죽음의 행진 시작…53년 5월 석방…54년 3번째 홍천서 사목…90년 서품 금경축 맞아
「죽음의 행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혀, 걸을 수 없는 사람을 죽을 때까지 걷게 했던 것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7백여 명의 포로 중 2백 명도 안 되는 숫자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죽음의 행진」에 참여했던 춘천교구 인제 「게세마니 기도의 집」 원장인 조선희(필립보ㆍ 82세ㆍ 골롬반회) 신부가 오는 11월 2일 자신의 고향인 호주 멜버른으로 귀국한다.
1939년 사제수품을 받고 이듬해인 40년, 한국교회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사연 많은 57년간의 사목생활을 뒤로한 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조선희 신부는 귀국을 앞두고 자신을 찾은 후배 사제에게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산 지난 시간들을 털어놓았다.
두 눈에 촉촉이 이슬이 맺혀가며 들려주는 조신부의 선교사로서의 삶은 속인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가 걸었던 바로 그 「십자가의 길」이었다.
조선희 신부의 한국에서의 사목생활은 시작부터가 순탄치 않았다.
1940년 11월에 춘천교구 홍천본당 보좌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인 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일본군에게 체포된다. 미국과 우방인 나라들의 외국인들을 잡아들인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첫 수감생활을 시작한 조신부는 일본을 거쳐 42년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포로교환으로 석방될 때까지 근 1년여 간의 옥살이를 했다.
『골롬반회 신부 중 미국과 우방인 호주, 뉴질랜드 사람만을 일본군이 체포했습니다. 저와 같이 포로생활을 한 신부는 모두 4명으로 뉴질랜드인 오남성(후벨도) 신부님과 허프란치스코 신부님이란 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프리카에서 포로교환으로 석방된 조신부는 42년 11월부터 호주로 돌아가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기를 기다려 47년 2월에 해방된 한국을 다시 찾는다. 그는 홍천본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아 홍천을 근거로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춘천교구에는 윤예원(도마), 김시몬, 이광재, 정신부 등 4명의 한국 신부가 있었다고 전하는 조신부는 윤신부 등 당시 한국인 신부님들은 항일운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홍천을 비롯 현리, 북평리, 송정, 결운 등을 관할했던 조신부는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사들이 그랬듯 거의 대부분의 거리를 걸어 다니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등 본격적인 사목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번엔 인민군에 의해 체포되기에 이른다. 전쟁 발발 3일만인 28일 인민군에 의해 체포된 조신부는 이때부터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게 됐다.
조선희 신부는 『본당 살림과 선교일을 도왔던 이들이 피난을 가자고 했지만 본당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에 그들만 보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하면서 『그러나 그들도 하루 만에 돌아와 함께 성당을 지키자고 했었다』며 『한국 사람들은 정말 충직하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고 덧붙였다.
28일 밤 12시 인민군에 의해 납치된 조신부는 곧바로 춘천의 유치장에 수감됐다. 조신부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춘천유치장에는 초대교구장이었던 구(인란, 퀸란)주교를 비롯 4명의 신부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신부는 『당시 춘천교구에서 사목을 했던 고안토니오 신부가 복사와 함께 길을 가다 인민군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전하면서 『총을 맞은 고신부가 복사를 몸으로 덮쳐 복사만 살아난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또 조신부는 『춘천유치장에서 간수가 구주교님을 밤에 끌고 가 죽였으니 다음은 내 차례라고 협박을 해, 정말 기도하면서 죽음을 기다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신부와 구주교 나머지 사제들은 서울형무소로 끌려가 40명의 외국인들과 함께 포로 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이들의 「죽음의 행진」은 서울을 시작으로 평양, 만포진, 중강진 등 압록강 근처까지 계속됐으며 3년여의 포로생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서울에서는 하루 한 끼 신문지에 보리밥을 배급했는데, 북으로 갈수록 배급량이 적어지고 옥수수, 좁쌀, 배추, 소금 등 한 달치 식량을 배급하고 이를 조별로 해 먹도록 했었다』고 전하는 조신부는 『당시 내가 제일 젊었었기에 주로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는 게 내 몫이었다』고 회상하며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조신부는 또한 『영양실조로 눈이 안 보일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호소하면 콩 한 줌을 먹게 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래도 구주교님을 비롯 교황대사인 방주교, 프랑스 신부 등이 함께 있어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조신부가 「죽음의 행진」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구주교의 따뜻한 사랑이었다. 체포 당시 얇은 옷만 입고 있었던 그가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본 구주교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자신에게 입혀주며 용기를 잃지 말자고 격려했던 일을 기억하면 지금도 눈물을 흘린다.
걸을 수 없는 사람을 죽을 때까지 걷게 했던 「죽음의 행진」, 10일 만에 1백여 명을 무참히 사살했던 「죽음의 행진」을 겪으면서 조신부는 당시 70세였던 바오로회 원장인 베아트리스 수녀를 인민군이 무참히 사살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미사는 물론이고 묵주기도도 못했던 기간 동안 잠시잠시 화살기도만을 바치며 이국땅에서 죽음을 넘어선 삶을 살아야 했던 조선희 신부는 결국 53년 5월 포로 중 제일 늦게 석방된다.
석방된 후 고향에 잠시 머물었던 그는 또다시 한국을 찾게 된다.
54년 8월 3번째 홍천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조신부. 그는 오늘날 춘천교구 아니 한국교회의 기틀을 다지는 사목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78년까지 홍천에서 사목생활을 한 조신부는 그 후 간성, 원통을 거쳐 89년 금경축을 맞아 은퇴하게 됐다. 그의 금경축 미사는 90년 9월 홍천본당에서 성대하게 봉헌됐고 그 후 조신부는 현재까지 인제면 게세마니 기도의 집에서 피정 지도를 하며 살아왔다.
「성인신부님」 「부지런하고 검소한 신부님」등 조신부와 얽힌 사목일화는 너무나도 많고 또 너무나도 감동적이다.
지병으로 일손을 놓기 전인 95년도까지만 해도 손수 용접을 해 배를 만드는 등 한시라도 쉼을 모르는 사제인 조선희 신부는 영구 귀국을 앞두고 찾아온 후배 사제인 김현준 신부에게 겸손하면서도 담담하게 지난 삶을 들려주었다.
『죽어서 이곳에 묻히고 싶었는데』라고 말하며 후배 사제를 바라보는 조선희 신부의 모습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어린 양들을 찾아 사지를 뛰어넘으며 살아왔던 그의 의연함이 풍겨왔다.
김현준 신부는 『신부님은 그리스도의 향내 나는 바로 그 사제』라고 말하며 『당신의 살아가신 길이 헛되지 않도록 더더욱 노력하겠다』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사제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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