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앞에 닥친 이별. 사랑하는 가족들, 아직도 남아있는 꿈들, 창가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 보이지만 이제 모든 것을 털고 영원한 휴식을 취할 준비를 한다.
죽음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수많은 날 동안 오직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 독한 약들을 먹었고 찌르고 또 찔러 더 이상 빈틈이 없어 보이는 팔뚝에 주사 바늘을 꽂았다. 시도 때도 없이 엄습했던 혹독한 고통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살고 싶다는 당연한 욕망은 번번이 절망으로 떨어졌다.
『왜 나인가! 왜 하필이면 나야!』하는 분노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오히려 신체의 통증보다도 더 고통스러웠다. 조금씩 죽음은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완전한 내 것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시한부 말기 암환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 육체적 고통은 그나마 남아 있는 삶마저도 벌써 죽음과 같이 만들고 만다.
호스피스는 바로 이처럼 의학적으로「선고」를 받은 말기 환자들이 편안하고 평화롭게 여생을 보내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필요성에서 시작됐다.
국내 최초로 지난 87년 호스피스과를 설치한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 과장 방명희 수녀는『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어온 말기 환자들에게는 편안하게 남은 생을 지내고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호스피스 역시 질병의 쾌유 가능성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간호의 일차적인 목적은 치유보다는 통증의 완화를 포함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인 전인적 간호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치유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더라도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예상되는 여생을 평화롭게 영위하고 의미 있는 죽음을 맞도록 돕는 것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처음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에 지쳐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따라서 의사와 간호사, 사회사업가 등 전문가들과 자원봉사자와 가족 등으로 구성된 호스피스팀은 절망에 빠져있는 환자들이 감정적인 혼란과 분노, 고독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결코 쉽지 않은 일. 그래서 호스피스 봉사는「고통스런 봉사활동」이기도 하다. 서울 청량리 성바오로병원에서 5년째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김옥제(가타리나ㆍ67)씨는 『누구나 처음에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말문을 열지 않는다』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까 막막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환자들이 극심한 고통으로 신음하는 것을 바라봐야 할 때나 젊은 가장이 부인과 철부지 아이들을 두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을 바라볼 때 봉사자들은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환자가 말문을 열고 손을 잡아올 때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봉사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깨닫는다.
강남성모병원 초대 호스피스 과장을 지내고 현재 성바오로병원 호스피스 과장으로 있는 조운자 수녀는 최근 두 대조적인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10여 년간 자신이 해온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느껴야 했다.
갓 30대에 들어선 한 청년이 간암으로 복수가 가득차 입원했다. 이 청년은 죽음의 위세에 눌려 하느님과 세상을 미워하는 마음만이 가득했다. 『하느님이 밉다. 한 번 준 생명을 이렇게 허망하게 다시 앗아가는 하느님이 밉다』. 며칠 후 청년은 영안실에 안치됐다.
또 다른 한 청년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항상 거울을 옆에 두고 정성스럽게 머리를 빗고 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임종 며칠 전에는 이발사를 불러 머리를 깎기도 했다.
대개 말기 환자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평화스런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호스피스 관계자들의 경험이다. 그래서 호스피스 병동 입원 대상자 기준에서도 임종이 3개월에서 6개월 사이로 예상되는 환자들을 우선 입원 대상자로 선정한다.
하지만 실제로 병동으로 오는 환자들은 대개 열흘에서 보름 정도면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추스려 정리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다.
봉사자들은 그래서 이제 조금 마음의 빗장을 풀기 시작한 환자들이 미처 많은 이야기도 나누기 전에 세상을 떠나면 착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이제 호스피스도 초창기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많은 환자들이 호스피스 서비스를 원하고 전문병동이 설치된 병원에는 대기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사는 것만큼이나 죽는 것도 중요한 인생사의 하나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은 것일까. 물론 아직도 호스피스 활동을 위한 시설이나 정책, 봉사자 등 외국에 비해 많은 것이 부족한 현실이지만 앞으로 호스피스 활동의 중요성과 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 늘어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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