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싣는 순서
①해방 이후부터 6.25 이전까지
②6.25 이후
③죽음의 행진
④제주교난과 일제 강점기
⑤평신도 순교자들
북한 공산군에 의해 자행된 「죽음의 행진」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남한에서 끌려간 성직자 수도자들이 그 한 갈래요, 이미 함흥 원산 평양 교화소를 거쳐 1949년 8월 5일부터 자강도의 「옥사독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던 덕원, 함흥교구 성직자 수도자들이 나머지 한 갈래였다.
죽음의 행진 첫 번째 희생자가 된 외국인 성직자 수도자들은 서울 소공동 삼화빌딩으로 이송돼 신문을 받다가 1950년 7월 19일 평양으로 이송됐다. 그 후 9월 6일 만포로 간 뒤 10월 8일~11월 7일까지 고산과 초산. 중강진을 거쳐 11월 7일~1951년 3월 30일까지 「하창리 수용소」에 수용됐다.
죽음의 행진을 겪은 1백여 명의 외국인 성직자 수도자 중 11명이 이 행진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옥사하거나 학살당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교황사절 번 주교와 서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원장 베아트릭스 수녀이다.
죽음의 행진이 본격화되자 북한군은 1950년 10월부터 각 처에 수감해 놓았던 한국인 성직자 수도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이 때 피살된 성직자는 김봉식, 유재옥, 이광재, 서기창, 양덕환, 전덕표 신부 등이었고, 수도자는 샬트르 김마리안나, 김안젤라 수녀 등이 학살됐고,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원장 장정온 수녀와 서요세피나 수녀가 행불됐다.
옥사독 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덕원, 함흥교구 베네딕도 수도회 성직자 수도자들은 1950년 10월 23일부터 만포를 향해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다. 이후 이들은 11월 13일 만포에서 관문리로 이송됐고, 1951년 1월 16일에는 86일 만에 다시 옥사독 수용소로 이송돼 여기에서 3년을 지내다가 1954년 1월 생환됐다.
죽음의 행진 전 1949년 체포된 73명의 베네딕도회 회원들 중 모두 31명이 희생됐다. 이들은 7명 행불, 평화 교화소에서 옥사하거나 피살된 이가 9명, 옥사독 수용소에서 희생된 이가 11명, 만포와 관문리에서 4명이 숨졌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보면, 당시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거나 피살된 성직자 수도자들은 대부분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실천하거나 교회를 지키려 했다. 훗날 죽음의 행진을 겪고 생환된 성직자 수도자 또한 수용소 생활 중에서도 기도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수도자들은 시간이 나는 대로 서로를 권면하고 수도 생활을 영위하고자 노력했다고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또한 피살된 성직자 수도자들도 공산군의 위협 아래서 『나는 천주교 신부요, 수녀』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이같은 정황으로 볼 때 6ㆍ25 때 희생된 성직자 수도자들은 종교를 말살하려는 공산군의 박해 속에 당당히 신앙을 증언했으며 그로 인해 살해된 사실이 확인되므로 교회법적으로 요구하는 순교자의 요건을 채웠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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