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결단을 내고 사단을 내고 즉각 지시하기 전에 잘 듣는 능력, 즉 순종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최우선이다.
IMF차관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부패한 정치에서 나온다. 지금의 금융위기는 사실 오랫동안 누적된 관치금융, 재벌특혜금융의 폐해와 이를 뒷심으로 정신없이 땅 투기, 중복 투자한 재벌에 원인이 있다.
대통령. 이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한때 받아쓰기를 가리키는 말과 독재자라는 말이 서양어에서 같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참 놀랐다. 독재자 dictator는 쉽게 말하면 명령만 하는 사람쯤 될 것이다. 받아쓰기를 dictation이라 하는 것은 선생은 말만 하고 학생은 쓰기만 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명령만 하는 통치자. 그는 곧 독재자가 된다. 국무위원들의 대통령 말씀을 열심히 받아쓰기 하는 모습을 연상하지 않더라도 우리 역사는 받아쓰기와 독재의 관계를 웅변해 왔다.
◆「대통령」이라 부르면…
이에 반해 대통령은 서양어 president를 번역한 것일진대. 이 president는 앞에 앉는 사람, 즉 의장쯤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으로 통한다. 국왕이나 총통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 다행이긴 하지만 민주국가의 대표를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부르는 것은 무언가 시대와 맞지 않는 듯하다. 대통령 대신 국가 의장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살짝 바꿔서 대청령(大聽領)이라고 하면 안 될지 모르겠다.
물론 말만 바꾼다고 권력의 실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라를 표현하는 말, 국가(國家)도 결국은 영토와 가족을 가리키고, 그 수반을 가리키는 말도 결국은 최고의 통치자 영도자라는 뜻일 때 과연 시민이 왜 정치에 참여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투표소에서 도장 찍는 일,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정치참여가 아닐까. 이 외에 내가 뽑은 국회의원이 이 당 저 당 옮겨 다녀도 소환할 수도 없고, 내 의견도 듣지 않고 전자주민카드라는「인간 바코드」제도를 도입해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묵묵히 따라가야만 한다. 이런「받아쓰기」의 정치, 배제의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서 다음 정권을 이끌 대통령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
표면상으로는 독재의 구습을 벗고 제도적으로 개선된 현재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지도력은 당분간 대통령의 의지와 비전에서 나올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른바 문민 첫 대통령의 개혁노선이 온갖 정치잡배와 이익집단의 훼방으로 거의 완벽하게 무위로 돌아간 것을 기억할 때, 다음 대통령은 보통의 추진력으로는 정치를 본질적으로 개혁하지 못할 것이다. 문민 1기 결단의 정치가 결국 대통령이라는 말뜻에 걸맞게「독단」의 정치로 끝난 것은 그가 듣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요는 결단의 정치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결단을 내고 사단을 내고 즉각 지시하기 전에 잘 듣는 능력, 즉 순종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최우선이다. 받아쓰기의 구술자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국민과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대통령, 감히 기대해 본다.
민주주의는 이른바 대ㆍ통ㆍ령의 존재의의를 사실 부정한다. 민주주의는 사실 대통령에게 의장의 역할, 조정자의 역할, 대변자의 역할을 요구한다. 이제 민주주의 욕구는 중앙권력의 분산, 지방자치의 강화, 국회기능의 활성화, 보수정당의 대개혁, 시민사회의 발전, 시민사회 지도력의 양성 등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실질적인 민주화의 대상을 보면 모두 받아쓰기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정당과 국회의 대개혁
국회만 보더라도 토론을 통해 이견을 조정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은 거의 보기 힘들다. 각 당 총무회담이나 고위층 야합으로 먼저 법안들이 거래되고 그 다음에 국회의원들은 거의 거수기 노릇만 한다. 자신이 통과시킨 법안의 이름을 다 알고 있지 못한 국회의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무능한 국회의원들을 소환할 수도 탄핵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나서서 입법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거의 원천봉쇄되어 있다.
「초등학교」부터「국회까지」충실히 이어지는 받아쓰기의 전통이다. 희망컨대 새 정권은 정당의 대개혁과 국회의 대개혁을 위해서 국민과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정권이어야 한다.
대통령과 정당, 그리고 국회의 민주화와 개혁을 이루어내면 우리 사회의 실질적 민주화의 절반은 이루어낸 것이다. 그 나머지는 중앙권력의 분산에서 찾아야 할 텐데 이 가능성 역시 대통령의 의지와 추진력에서 나올 것이다. 모든 부패한 권력은 집중ㆍ비대해지려는 속성을 갖는다. 부정한 권력은 폐쇄적일수록 비대할수록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부패와 집중은 정치권력, 경제권력, 언론권력을 막론하고 쌍둥이처럼 따라다닌다. 먼저 정치권력의 분산, 또 분산에서 오는 개방성과 투명성, 이 과정은 지방자치의 활성화와 보다 많은 시민들의 정치참여로 이어질 것이며, 받아쓰기의 정치에서「생활정치」로 이동하는 위대한 과정이 될 것이다. 이것은 정치와 경제를 살리는 돌파구다. 희망컨대 새로운 대통령은「더 적게, 더 작게, 더 엷게」라는 권력관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이 역시 대ㆍ통ㆍ령의 자기부정이다.
◆정치 풀면 경제도 풀려
이렇게 해서 정치를 풀면 경제가 풀린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굴욕적 조치로 보는 IMF 차관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부패한 정치에서 나온다. 지금의 금융위기는 사실 오랫동안 누적된 관치금융, 재벌특혜금융의 폐해와 이를 뒷심으로 정신없이 땅 투기, 중복 투자한 재벌에 원인이 있다. 자동차, 철강, 전자분야가 대표적인 중복투자의 예다.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이런 황당한 특혜와 투자는 정치가 부패했기 때문에 나온다. 또 재벌로 보면 다스릴 수 없는 수많은 기업을 소수 가족의 독재로 다스리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역시 받아쓰기의 횡포다. 언론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과소비와 무분별한 수입을 원인으로 꼽고 있는데 이는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부패한 권력과 부패한 재벌이 부패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권력을 휘두를 때 모든 나라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병리일 뿐이다. 받아쓰기의 정치를 고치면 받아쓰기의 경제가 풀린다. 그러므로「새로운」대통령은 정경유착과 재벌경제의 대수술과 직결된다.「새로운」대통령의 권력분산은 지방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기업 내 노동문화도 활성화시킬 것이다.
21세기의 대통령은 시민참여와 국민복지를 확대해서 새로운 민족통합을 이루어내야 한다. 이는 시대의 명제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 권력과 정책결정에 대한 발상을 대전환하면 의외로 정치와 경제는 쉽게 풀 수 있다. 요는 받아쓰기의 구조, 즉 독점과 독단의 구조를 쇄신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바라는 정의, 참여, 복지, 화합이 가능하다. 받아쓰기의 전통을 잘 듣는 전통으로 바꾸는 대통령, 그는 자신이 대ㆍ통ㆍ령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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