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야 할 시점
1. 2000년 대희년을 눈앞에 두고「성령의 해」를 시작하는 대림시기에 맞이한 제 16회 인권주일의 의미는 각별합니다.
단순하게 한 세기가 아니라, 새로운 천년기를 준비하고 맞이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진정한 회심과 쇄신을 통해 삼천리 방방곡곡에「생명의 복음」이 살아 숨쉬는「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야 할 중요한 시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우리를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육신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시어』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인간의 품위를 천상에까지 높이 올려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여 우리도 인권을 존중하며 서로 사랑하고 화해하여 7천만 겨레가 하느님 앞에 민족의 평화를 이룩하도록 평화의 사도로서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2. 하느님 모습대로 지어진 인간은『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완전한 반영』인 까닭에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완전한 인권을 누리지 못한 채 총체적인 부패의 사슬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합집산 일삼는 정치 현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손에 넣으려는 끝없는 욕망으로 빚어진「죄의 구조」가 사회 구석구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법과 정의가 떨어지고 도덕과 질서가 문란해져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기가 어렵고, 부자와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정신적 빈곤이 더욱 깊어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말로는「국민」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국민보다 개인의 권력욕을 앞세워 당리당략에 날이 새고, 국가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개인과 집단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올바른 원칙이나 정책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소신 없이 이합집산을 일삼고 있는 것이 오늘의 정치 현실입니다.
서민들의 탄성 하늘 찔러
3. 우리 사회의「죄악구조」중 특히 정경유착이 가져온 폐해는 오늘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민생활 전체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정경유착을 관행처럼 당연시 하면서 검은 돈으로 치부하고, 돈으로 공천을 사고팔면서 패거리로 세력을 키워나가고, 이것은 다시 정당의 정책개발 빈곤으로 이어지고 오직 반대당 인사들에 대한 인신공격과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을 정치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결국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마침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장래를 어둡게 할 뿐입니다.
이젠 정경유착 고리 끊어야
정경유착은 우리 경제를 파국에 이르게 하였고「국가 부도」라는 수치를 국민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경유착의 만행은 사회생활 전반에 번져「돈을 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서민들의 탄성이 하늘을 찌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난날의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치문화를 꽃피우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청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으면서 집단과 개인의 이기주의를 극복하고『공동선』을 지향하며 더불어 인간답게 사는, 사랑의 정치와 경제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4. 바로 이러한 때에 맞이한 이번 제 15대 대통령 선거는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가늠하는 중차대한 선택입니다.
각자 품위에 맞게 자유 행사 필요
국민 각자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기 품위에 맞게 윤리 도덕의 기반 위에서 자유를 행사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고, 또한 참된 민주사회는 그 구성원들을 이러한 민주적 역량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시켜 주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만능이 아니며, 정의와 윤리에 어긋나는 부도덕한 정책 결정을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로부터 요청되는 정의와 윤리의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그 요구를 내세우는 집단들의 선거 영향력과 재정능력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거운동에서부터 투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행위에 있어 올바른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진리와 정의 그리고 윤리도덕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유권자인 국민 대다수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후보자의 인격과 태도 즉 그들의 도덕성을 알아보고 고려해야 하고, 정당들의 정책 이면에 깔린 가치관에 유의해야 합니다. 특히 인간생명의 신성함을 무시하는 후보자와 정당들을 가톨릭 신자들은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 깨닫는 겸손 절실
선거와 관련해서 우리가 유의할 것은『진정한 민주주의는 법치국가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올바른 인간관의 기초 위에 성립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모든 정치 토론이 국민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다른 사람의 죄보다 먼저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달으라』는 복음서의 가르침대로 겸손의 정신이 요청됩니다.
5. 그렇다면「12·18 대선」에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은 공동선을 증진시키고『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더 이상 정경유착에 매이지 않고 그 고리를 끊어 버림으로써 공동선에 봉사하여 민족의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입니다. 법과 정의를 올곧게 세우는 사람, 특히 고통 받고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의와 사랑의 정치를 구현하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 꼭 필요한 대통령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과 신뢰를 보이고, 생명의 신성함을 인정하고 진실로 인간과 사회의 봉사하는 사람, 돈 선거와 지역감정을 끌어내고 일치의 정신으로 통일을 준비하는 가운데 겨레의 제 삼천년기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 그러한 지도자가 요청되는 때입니다.
6. 『완전하신 하느님』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사람도 없으려니와 인격적으로도 완성된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의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도 커지고 마땅한 인물을 찾기도 힘들 것입니다.
신성한 권리인 투표, 포기해선 안 돼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실망하고 좌절해서는 안 되고 더구나 국민의 신성한 권리인 투표권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사람들이고 부족한 사람들일수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가장 부족한 사람들끼리 사는 사회가 더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겸손은 진리입니다. 『지상의 모든 권리가 하늘에서 오는 것』이라면 신앙 안에서 본 참된 선거는 하느님이 선택하신 분을 우리가 식별해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빛으로『선과 악을 구별하는 시각으로 식별해내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선거는 국민 전체가 하느님께로 시선과 마음을 돌리는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꽃피는 축제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번 선거가 국민적인 축제가 되게 하여 이 땅에서 선거 후유증이라는 말이 사라지게 합시다.
이젠 선거 후유증 사라지게 합시다
7. 우리 다 함께 힘을 합하여 우리가 만든 선거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를 공정하게 치러야 하겠습니다. 유권자는 지역주의를 버리고, 혈연이나 학연, 종교적 배경 등 정실에 흐르지 말고 진실되고 겸손한 자세로 공정하게 투표권을 행사합시다.
대중매체의 공정한 보도 촉구
공공성을 내세우는 대중매체는 인신공격을 부추기지 말고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공정한 보도를 통해 국민들의 바른 선택에 이바지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 또한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법이 지켜지는 선거풍토를 확립해야 합니다.
8.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 참된 관계를 맺도록 노력합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긴장을 없애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소해 줍니다.
선거열풍 속 굶주린 이도 생각을
선거열풍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늘진 곳, 춥고 배고픈 이웃이 인간다운 삶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이들, 특히 인권의 동토에서 정신은 물론 육체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북한의 형제자매들을 기억하고 우리가 형제적인 사랑을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 함께 평화를 위하여 일하고 새로운 정치문화를 활짝 꽃피우면 우리는 2000년 대희년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97년 12월 7일 제 16회 인권주일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석희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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