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 매섭게 몰아치던 추위가 한풀 꺾이는가 싶던 지난 4일, 박성태(78) 이상금(76)씨 부부가 살고 있는 김해시 구산동 주공아파트 109동 407호는 이런 날씨의 변화에는 아랑곳없이 냉랭함만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노구를 움직이며 손님을 맞으려 애쓰는 모습이 『이런 빌미로 괜한 고생시키는 것은 아닌지』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11평 남짓한 공간, 생활보호 대상자인 이들에겐 나라에서 영구 임대주택으로 마련해 준 이런 집이라도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잠시 몸을 녹이는가 싶더니 금새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우선 방바닥부터가 너무 차다. 20여분도 채 안 돼 이 정도니 안방에서도 두터운 이불로 온 몸을 감싸고 있던 박할아버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한 달에 20만 원 나오는 생활비로는 겨울철 마음 놓고 보일러를 틀 수가 있어야지. 노인네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약 사먹어야지 하다 보면 난방은 생각도 못해』. 아무래도 노부부가 편안히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이것저것 쌓아놓은 가재도구들 한켠에 라면 더미가 눈에 들어온다. 『웬 라면이 이렇게 많아요』. 어리석은 질문이었을까, 씩 웃고 마는 박할아버지의 얼굴이 『몰라서 물어』하고 되묻는 듯하다.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풍족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이 라면뿐이다. 아침은 라면, 점심은 인근 복지관의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하고 저녁은 다시 라면으로 해결한다. 그나마 요즘은 날씨도 추운데다 몸까지 시원찮아 세 끼니 모두 라면으로 때우는 수가 많다.
깊게 패인 주름, 야윈 몸집 만큼이나 이들의 삶도 풍상과 격랑으로 얼룩져 있다.
12살 때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박할아버지. 선반기술공으로 생활하던 그에게 52년 무렵 허리 디스크가 생기면서 시련이 닥쳐왔다. 일본인들의 갖은 수모를 견디며 처자식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건만 육신이 병들자 모든 게 달라졌다. 좌골신경통에다 당뇨까지 겹쳤다.
일본에서도 생활보호대상자 보호를 받았다. 지난 81년 50년 만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한국에서 살아갈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본에 있으면 굶지는 않고 의료혜택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
해방되던 해 4살 난 딸 하나를 업고 한국에 건너왔다는 이할머니도 다를 바 없다. 젊은 시절부터 남편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딸 하나에 의지한 채 외로움을 삭이며 살아왔지만 남은 것은 고혈압과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고통뿐이다.
시장에서 채소장사도 했고, 옹기장사도 해 봤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며 고개를 돌리는 할머니 눈 주위가 촉촉이 젖는다. 하나뿐인 딸은 남편의 사업실패와 불화로 모습을 감춘 지 오래다. 사위는 알코올중독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만 풍문으로 접했다.
『둘이 살 땐 괜찮아. 이러다 죽고 혼자 남게 되면 어쩌나 매일 그 걱정이지 뭐. 몸이라도 아플 땐 더 그래』. 목이 메이는지 고개를 숙인 할머니를 바라보며 던지는 할아버지의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든다.
『복지관에서도 오고, 성당에서 방문해주고 도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지난번에도 수녀님과 여러분이 와서 10만 원을 주고 갔어. 참 고마운 분들이지』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를 문간에 서서 배웅하는 눈빛이 여간 서운해하지 않는다. 잠깐 동안이지만 말동무를 잃게 되는 아쉬움일까. 4층 계단을 내려와 올려다 본 베란다엔 조금 거동이 나은 할머니가 나와 또 한 번 배웅해준다. 코끝이 찡해 오랫동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