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천주가사 연구의 문제점은 「저자」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점이다. 천주가사 일부 전사본 중에 최양업 신부의 저술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것을 토대로 지금까지는 1850-60년대 저술된 것으로 인정돼 왔고, 친 저자 역시 최양업 신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호남교회사 연구소장 김진소 신부와 수원가톨릭대학교 하성래 교수 등은 최양업 신부의 친저성에 상당한 의문을 가져 『일부가 최신부의 저술인 반면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신자들이 지어 최양업 신부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천주가사는「한국교회 초기 천주가사」와 「1850년대 천주가사」「신앙자유기 이후 가사」등 3가지로 구분돼 전해지고 있다.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조사 수속록
한국교회사연구소 차기진 박사가 이번에 1850년대 천주가사의 친 저자를 분명하게 밝혀낸 자료는 바로「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조사 수속록」이다.
현재 서울 합정동 절두산순교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이 수소록은 1882~1905년 사이 조선교구에서 1839년과 1846년의 기해, 병오박해 순교자 82명의 시복을 위해 증인들을 불러 순교자들의 생애와 순교 행적을 조사하고 검토하면서 작성한 시복 재판 기록이다.
수속록은 모두 5권으로, 재판 회차순으로 수록돼 있으며 한지에 한글 필사본으로 쓰여져 있다. 수속록은 로마 교황청에서 1921년경 간행한 「79위 시복조사 증거서」의 원본으로 재판 과정은 제 1회차에서 회차 1백21까지 진행됐고, 동원 증인은 모두 42명인 것으로 기록돼있다. 현재 수속록은 회차 1과 회차 1백6 이하가 빠져 있는데 차기진 박사는 빠진 부분은 한글이 아닌 라틴어로 작성돼 원본 자체가 교황청에 보내졌고, 인류복음화성 비밀문서고에 소장돼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지적했다.
■ 「수속록」의 자료 가치와 신빙성 문제
기해 병오 순교자 시복 조사 수속록은 그 재판 기록으로 일부가 원본 그대로 교황청에 보내질 만큼 내용의 신빙성은 논할 필요가 없다.
이 재판은 블랑 주교의 명을 받아 1882~85년까지는 뮈텔 신부가 담당했고, 시복 서기는 로베르 신부가 담당했다. 뮈텔 신부가 1885년 신학생지도자로 책임을 맞자 프와넬 신부가 새 시복판사로 임명됐다.
뮈텔 신부와 프와넬 신부의 재판기록 인계는 1885년 4월 26일 회차 87때 이루어졌다. 이때 인계한 목록은「기해 치명일기」 「옥즁뎨셩」(獄中提醒) 「삼셰대의」(三世大義) 「상재상서」이다.
■ 수속록이 증언한 천주가사 친 저자
그동안 천주가사「옥즁뎨셩」은 작가가 미상인 것으로 알려져 왔고, 「삼셰대의」는 김동욱과 김약슬 소장 가첩에 적혀 있는 대로 최양업 신부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바로 이 수속록은 회차 87(1885. 1. 27)에서「옥즁뎨셩」은 성 이문우(이경천) 요한의 작품이고, 「삼셰대의」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민극가 스테파노의 작품임을 기록하고 있다.
뮈텔 신부는 이는 각각 회차 43(1883. 7. 10) 유 바르바라의 증언과 회차 86(1885. 1. 27)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차기진 박사는 이 수속록을 증거로「옥즁뎨셩」은 하나의 천주가사이며, 지금까지「천당가」「지옥가」「십계명가」등 각기 독립된 천주가사로 알려진 것을「삼세」즉 천당과 지옥, 세속을 말한 하나의 천주가사「삼셰대의」라고 밝히고 있다.
■ 천주가사 친 저자 발굴 의미
차기진 박사의 이번 천주가사 친 저자 발굴 연구업적은 지금까지 천주가사에 들어있는 깊은「순교신심」과「순교원의」「철저한 교리 준수」내용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천주가사의 친 저자가 순교 성인들이었다는 사실은 103위 한국 순교성인들의 깊은 신앙심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자신의 순교의지 뿐 아니라 신자들에게 순교를 권면한 글이라는 점에서「동학가사」보다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더 높이 평가받을 만합니다』
차박사는 덧붙여 『천주가사는 많은 이본(異本)들을 통해 신자들 사이에 널리 읽혀졌고, 기해박해 이후 신자들에게 순교신심을 함양하는데 큰 영향을 미쳐왔다』고 부연했다.
■ 다시 쓰여져야 할 한국천주교회사
천주가사의 친 저자가 기해, 병오박해 순교성인들이라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그 저술 연대는 지금까지 알려진 1850~60년대에서 최소 2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차박사는「옥즁뎨셩」은 이문우 성인이 옥에 갇혀있던 1839년 작품이며, 「삼셰대의」는 민극가 성인이 순교할 당시인 기해박해 시기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천주교회사의 일부는 새로 쓰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울러 천주가사 중 가장 유명한「사향가」역시「옥즁뎨셩」과 마찬가지로 「순교원의」와「교리실천」을 강조하고 있어 이 시기의 유사한 작품이며 순교자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조심스레 유추했다.
■ 남은 연구과제
차기진 박사는 김진소 신부의 연구 결과를 빌려 천주가사의 내용이 신자들에게 계속 전해져 신앙 자유기 이후 천주가사와「사후묵상」「성교절요」등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그는『천주가사의 특징은 외교인들에게 교리 전파를 하는 목적보다 교우들의 순교 신심과 교리 실천을 강조하는데 더 큰 저술 목적이 있었다』면서 『이는 하느님 나라, 즉 본향으로의 희원을 갈구하는 천주가사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차기진 박사는 또한 『천주가사를 보면「옥즁뎨셩」은 종말론적 신앙을, 「삼셰대의」는 육화론적 영성을 노래하고 있어, 박해시대 순교성인들이 이들 두 영성을 모두 공유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천주가사는 앞으로 박해시대 토착화 연구와 직결시켜 파악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연구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차기진 박사는 『이번 발굴이 한국교회사 연구뿐 아니라 가사문학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교회사는 물론 국문학과 국학 분야의 전문학자들과 공동으로 천주가사 연구 작업을 추진해볼 욕심』이라고 피력했다.
◆ 천주가사 친 저자로 밝혀진 성 이문우·민극가는?
■ 성 이문우(요한)
천주가사「옥즁뎨셩」의 저자로 밝혀진 이문우 성인은 일명 경천으로 불리고 세례명은 요한이다.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5살 때 양친을 여의고 서울의 오바르바라라는 여교우에게 입양돼 성장했다. 그는 독신을 원했으나 양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순종으로 결혼했고 몇 년 후 아내와 어린 두 자녀가 사망하자 재혼 권유를 뿌리치고 독신으로 생활했다.
그 후 앵벨 주교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돼 전교에 힘쓰며 주교를 보좌하며 지방을 순회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된 교우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사방에서 희사를 모으고 주교에게 박해상황을 보고하다 11월 11일 자신도 체포됐고 이듬해 2월 1일 서울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 성 민극가(스테파노)
민극가 성인은 인천의 양반집에서 태어났고,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가족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모친이 사망한 후 부친이 중년에 이르러서야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민극가는 서울 인천 수원 등지를 돌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했고, 가는 곳마다 냉담자들을 권면했으며 자선사업에도 힘썼다.
앵베르 주교로부터 회장직을 임명받은 민극가는 1839년 12월 체포됐고, 옥중에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교우들을 권면했다.
그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