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124위의 조이(召史, 나이 많은 여성 혹은 과부를 뜻하는 이두)들 가운데는 최조이와 이 조이도 있다.
최조이(바르바라)는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대부분의 여인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웠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마르첼리노)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순교자의 딸로서 일찍부터 매우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던 그에게 장성한 후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신태보(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것이다. 시아버지 곁에 홀로 남은 탓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는 결코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천주와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를 보였다.
남편을 잃은 후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도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를 자주 찾아갔고, 미약한 힘이라도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최조이는 체포돼 전라도 전주로 압송됐으며 감사 앞에 나아가 오래 전 순교한 최창주의 딸이라는 것을 밝혔다. 또 자신의 시아버지 신태보도 올봄 전주에서 순교했다는 사실도 낱낱이 고백했다. “죽는 길밖에 없다”는 감사의 답을 들은 그는 1840년 1월, 당시 50세 나이로 참수됐다.
이조이(막달레나) 또한 19세 때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된 인물로 그의 남편은 죽기 전 그에게 수계를 열심히 지키도록 당부했다고 한다.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시부모에 대한 효도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천주께 비교적 덕을 닦기 쉬운 처지에 두어주신 것을 감사했다. 가난했지만 대재와 소재를 지키며 극기를 실천했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힘썼으며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839년, 이조이 또한 최조이를 비롯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돼 전주로 압송된다. 갖은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그는 옥에 돌아와서도 교우들이 끝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도록 권면하는데 남은 힘을 쏟았다. 32세의 나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하다.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께 충실해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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