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정지』
모든 것이 멈췄다. 간간이 아직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미세한 몸부림이 있을 뿐 적막하다. 더욱이 밤새 내린 흰 눈이 시커멓게 멍든 속내를 감추듯 온 동리를 덮어 그 적막감은 더하다.
태백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강원도 고한. 가쁘게 내쉬는 기관차의 거친 숨소리를 무심한 채 뒤로하고 바쁘게 역을 벗어나는 순간 마치 금새 큰 폭발이 일어날 듯한 팽팽한 긴장감에 섬짓해졌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버려진 집들과 지친 듯한 눈빛들뿐이다. 이방인의 분주함에도 관심이 없는 양 쳐다보지도 않는다.
광산업이 한창일 때 『지나가는 개조차 배춧잎(1만 원권)을 물고 다닌다』할 정도로 경기가 좋았지만 고한은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 이후 줄곧 곤두박질 쳐왔다. 인구도 5만이 넘던 곳이 이젠 5~6천 명 밖에 남지 않았다. 모두가 떠난 것이다.
갈 곳이 없어 마지막으로 찾았던「막장」을 떠나 부산으로 경기도 부천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성공해서 탄광을 떠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먹고 살길이 없어 막노동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대책 없이 짐을 꾸린 것이다.
고한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떠나고 싶어도 도시에 나가 사글세 하꼬방도 얻을 형편도 못된다. 그래서 마냥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한라 시멘트가 이곳에 들어온다고 해 새로운 일터를 찾을 수 있겠구나 하며 잔뜩 기대했으나 최근 IMF 사태로 부도가 나자 그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고한 주민들은 이젠 『살길이 모두 막혔다』고 망연자실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한 이곳에도 훈훈한 삶의 온기가 남아있다. 비관할 줄 모르는 고한본당(주임=안승길 신부) 신자들의 아름다운 나눔의 삶이 이곳에 남아 있는 유일한 열기이다.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수가 30여 명 안팎. 교무금으로 1년간 들어오는 돈이 1백50만 원 정도이고, 본당 연 예산이 3천만 원도 안 된다. 그러나 고한본당에서 사회복지비로 나가는 돈이 연 7~8천여만이 넘는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형국이다.
사제관비마저 몽땅 본당 사회복지비로 사용, 5개월째 사제관비를 받아보지 못했다는 안승길 신부는 혼자 사무장 노릇과 주방일을 맡아 한다.
밥짓고 설거지하는 일이 이젠 몸에 배인 안신부는 지역 주민들이 어렵게 사는데 혼자 호의호식할 수 없다며 중고차를 사서 타고 다닌다. 또 우중충한 성당 분위기가 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며 안신부 혼자 힘으로 페인트를 사서 성당 벽에서부터 교리실까지 모두 도색을 새롭게 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저 혼자서라도 해야지요』.
고한은 유달리 소년소녀 가장과 버려진 노인들이 많다.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고 싶어 부모와 자식마저 버리고 떠난 어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한본당도 청소년들과 생계보호 대상자ㆍ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사회복지 활동에 비중을 가장 많이 두고 있다.
「흑빛 공부방」은 고한본당이 설립한 이곳 유일의 공부방이다. 93년 12월 고한 구성당에 설립한 흑빛 공부방은 성심수녀회 수녀들이 나와 아이들의 엄마와 친구, 누이가 되어 공부를 가르쳐 주고 있다.
현재 36명의 남녀 중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이곳에도 7명의 아이들이 엄마가 가출한 결손 가정에서 살고 있다. 지난해 10월 흑빛 공부방에 자그마한 소란이 있었다. 함께 공부하는 두 학생이 가출을 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 아이는 가출한 엄마 대신 진폐증에다 중풍을 앓는 아버지를 모시며 살던 중2의 어린 학생이었다. 날마다 고추장에 파를 찍어 먹으며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가 지탱하기에는 삶의 무게가 너무나 컸다.
함께 집 나갔던 친구의 형편도 비슷했다. 그러나 혼자 병석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잊지 못해 이내 집으로 돌아왔고, 함께 떠났던 친구는 지금도 서울 동대문의 한 중국집에서 일하며 흑빛 공부방을 잊지 못해 가끔 공부방 채현주(이사벨라)수녀에게 전화를 해 온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부방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삶, 「우리가 여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당당히 자신들의 처지를 연극을 통해 또래의 다른 친구들 앞에 공개하는 용기도 갖고 있고, 길거리 농구대회에 나가 입상을 할만큼 패기도 있다. 또 자치회를 구성, 매주 출석률이 좋고 모범이 된 친구에게 사탕 목걸이를 선물하기도 한다.
서로가 버팀목이 되고자 벌써부터 철든 행동을 보이는 이들이 채수녀에겐 대견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이들의 의지가 더 이상 꺾이지 않게 하기 위해 고한본당은 성심수녀회와 여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 청소년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고한본당은 흑빛 공부방뿐 아니라 더 많은 지역 청소년들이 고급문화를 접하도록 음대 교수들과 가수들을 초빙「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제」를 열고, 성교육을 비롯한 각종 강좌를 열고 있다.
고한본당은 또 상설「헌옷 알뜰시장」을 마련, 연 3백만 원의 수익을 올려 지역 가난한 주민들을 돕고 있다. 신자든 비신자든 누구나 돕는 고한본당은 무의탁 노인 가정에 김장김치를 담가주고, 연탄과 기름 등 난방연료를 마련해 주고 있다.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김장을 담그는 날이면 본당 신자 30여 명이 총동원되고, 남자 신자들이 1천5백 미터 고지의 산골짜기까지 김장김치와 연탄 배달을 마다 않고 한다. 혼자 사는 이들 노인들이 혼수상태나 다쳐 치료비가 2~3백만 원이란 큰돈이 들 때도 고한본당 신자들이 자기 가족이 다친 양 급전을 마련해 치료비를 댄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돼 요즘에는 각지에서 성금과 옷가지들이 쏠쏠하게 들어오고 있다.
본당 예산은 빠듯하나 본당 사회복지 기금만큼은 대도시 여느 본당보다 더 많은 고한본당. 비록 자신들의 생계가 막막하고 앞날이 어둡지만 자신의 처지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뜻 품을 팔고 주머니를 터는 고한본당 신자들. 그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웃을 통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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