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달려온 1995년은 낙엽처럼 뒤섞이는 생명의 낙화현상이 사회 여기저기서 일어나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백화점이 인간 존엄성을 함께 안고 무너져 내렸고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 신문과 TV를 오르내리며 서민들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이런 모든 기억들을 녹이며 새해의 태양이 설악산에 떠올랐다.
표고차가 수십 미터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강렬한 물보라를 휘날리며 깊은 계곡으로 곤두박질 치는 폭포, 울창한 산림. 설악산에는 엄청난 자연의 생명 에너지가 맥박 친다.
이 생명의 산에서 홀로 깨어 생명을 지켜나가는 한 신앙인의 발자취를 따라 새해를 연다.
해가 산자락 속으로 자취를 감추면 붉은 저녁 노을도 잠시, 어둠은 산에서 더 빨리 찾아온다. 이 어둠의 산을 한 신앙인이 지키고 있었다.
신앙을 풀어 생명을 밝히는 사람.
서울에서 자가용으로 5시간여 걸리는 속초시. 이 곳에서 10여 분 남짓의 거리, 설악산 산자락 밑에 자리 잡은 설악동에는 항상 맑은 설악의 기운이 넘친다.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 246번지「설악산 적십자 산악 구조대」.
설악동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민간 자원봉사자 29명이 연간 4백만여 명에 이르는 설악산 등산객들의 생명을 지키는 곳.
마운락(미카엘ㆍ47ㆍ설악동본당)씨는 이곳 구조대의 대장이다.
그는 1974년 27살의 젊은 나이로 설악산에 들어온 이후 20여 년간 지금껏 하루도 어김없이 이 산을 지켜왔다.
설악산을 찾는 산악인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마 대장은 아침 기상시간이 여느 평상인들처럼 일정치 않다. 구조 요청이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때면 그는 등산 장비와 구조 장비들을 점검한다.
점검할 구조 장비라야 자비로 마련한 로프, 자일과 지난 1992년에서야 적십자에서 보급된 무전기가 전부다.
점검이 끝나면 그제서야 그는 시선을 대원들에게 돌린다.
구조대 대원들을 모두 마 대장과 같은 처지의 자원 봉사자들이다. 농업, 양돈업, 자영업 등이 그들이 내놓은 이력서,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구조대 사무실에 들리는 이들은 구조 요청이 들어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산으로 달려간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합니까? 산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산장에서의 다급한 구조 요청이 무전기를 통해 전해지면 마 대장은 급히 대원들에게 비상 연락을 취한다. 돼지에게 주사를 놓다가, 가게에 찾아온 손님을 맞다가, 거름을 만들다가 대원들은 각기 구조 장비를 챙겨 들고 모여든다.
산 속에 고립돼 추위와 굶주림으로 탈진상태에 이른 생존자를 살리기 위해 이들의 마음과 발걸음은 다급하다. 대략적인 위치 확인과 환자의 상태가 파악되면 지프 두 대에 장비를 나눠 실은 이들은 곧바로 산으로 향한다. 차가 들어가는 곳까지 도착한 이들은 곧장 도보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누구보다도 설악산 지리에 밝은 이들은 가장 빠른 지름길을 택한다. 이럴 경우 구조시간이 얼마가 걸릴지,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조난자가 생존해 있을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오직 생명을 살리기 위해, 누구도 시키지 않는 이 일을 위해 빠른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 구조대는 말이 없다.
이런 조난사고가 발생할 때는 마 대장은 구조작업의 선두에서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지휘해야 한다. 구조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서는 그래서 자신의 생업인 공산품 도매업을 뒤로 한 채 거의 사무실에 나와 살다시피 한다.
마 대장에게는 생명 살리기가 본업인 셈이다.
지금까지 마 대장과 동료 대원들이 구조한 사람의 수는 그들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 현재 설악산에서 구조되는 인명의 90%는 이들 민간 구조대에 의한 것으로 연간 50여 건의 구조 실적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 수시로 생기는 작은 조난사고를 포함하면 이들이 설악산 인명 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다.
「설악산을 찾는 사람들은 바로 나와 같은 산악 동호인」라고 표현한 마 대장은「그런 산악 동호인들이 위험에 처했는데 어떻게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산을 찾아오는 이들의 안전은 산에 살고 있는 이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 대장은 그래서「설악산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니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운 듯, 초연해 보이는 산 사람들. 생명의 활기가 넘쳐흐르는 설악에 사는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구조작업에는 적지 않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지는 1982년에는 선배 구조대원이 계곡에서 인명을 구조하고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일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평소의 훈련을 중시하는 마 대장은 대원들을 혹독한 훈련으로 내몰곤 한다.
구조대원들은 48시간 이상 걸리는 구조작업에도 견딜 수 있는 체력과 기술을 항상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마 대장의 혹독한 채찍질 뒤에 숨은 뜻이다. 계속되는 훈련과 고통의 감수, 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이들의 필수조건이다.
마 대장은 생명의 존엄성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마음 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생명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거창한 이론 같은 것은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마 대장은 1976년 9월 13일 부인 김현숙(안나ㆍ43)씨와의 약혼식 날 춘천교구 주문진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이후로 신앙활동을 해오고 있지만 주일의 구조활동이 대부분인 까닭에 미사를 거르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부인과 다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신앙과 생명이라는 갈등 속에서 그는 생명 구조의 일을 선택했다. 대장이 구조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일은 바로 하느님과 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 대장은 구조에 나서서 사망자를 발견할 경우 시산 앞에서 조용히 성호를 긋고 짧은 기도를 드린다.
「저는 특별하게 인간 존엄성과 생명에 대해서 강의를 듣거나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학 등의 고등교육을 받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적극 동참하고 뛰어드는 적극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생명력이 넘치는 설악산을 사랑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숨어서 하는 마 대장은 산을 좋아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산을 오르고 생명을 살린다.
그는 여느 등산객처럼 설악산을 즐기기 위해 오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오직 인명 구조와 구조훈련 등의 일로 오를 뿐이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숨 가쁘게 잇고 있는 마 대장의 자원봉사활동은 이미 1만5천 시간을 넘어서고 있다.
자원봉사활동을 통한 생명 살리기 노력은 이제 마 대장 한 명에 속한 일이 아니다. 마 대장이 생명과 함께 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현재 신앙인으로서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생명 존중이라는 스스로의 소망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생명을 살리는 별 넷의 마운락 대장. 그는 새해를 여는 오늘도 생명을 위해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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