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주일 제정 의의
작년 가을 주교회의에서 마침내 「농민주일」을 제정하였다. 주교회의의 농민주일 제정은 여러 면에서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농민주일 제정은 그 동안 농민사목에 참여해 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 농민문제를 걱정하는 교회의 많은 이들의 오랜 요구이고 바람이기도 했다. 이 같은 요구와 바람이 이제야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교회의의 결정은 오늘날 농민문제, 농촌 농업문제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음의 반증임과 동시에 우리 교회의 농민사목 정책이 보다 적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바람직한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94년 봄 주교회의에서 우루과이라운드협상 타결로 더욱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농촌을 살리기 위한 실천적 대안으로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결정한 것과 더불어 한국 천주교회의 농민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써 교회 안팎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얻고 있다.
농민주일 제정은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실천하는 사회사목의 구체적 모습이라 할 것이다.
가톨릭 농민회 활동사
해방 후 한국전쟁까지의 농민운동은 일제하의 비합법적인 상태에 놓여있던 농민조직이 폭발적으로 공개 집단화되면서 소작투쟁, 토지개혁과 민족해방, 민중정권수립이라는 목표를 쟁취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농민운동은 미군정의 지배와 좌우이념 문제 등으로 효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50년 정부 주도의 농지개혁이 개량적으로나마 실시되고 그 후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자유당의 독재와 냉전논리 속에 모든 대중운동이 중지된 것처럼 농민운동은 사실상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분적으로 몇몇 농민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다가 사라졌고 사회운동으로서 농민운동성을 띤 것이 아닌 기술보급, 교육연구 등을 목적으로 한 4-H 구락부 연합회, 전국 자원지도자 연합회, 전국 농업기술자협회(1963) 등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전후(戰後) 사회운동으로서의 농민운동 시작은 70년대 초반 공화당 정권의 차관개발 공업화 정책의 모순이 심화되면서부터 구체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가톨릭 농민회의 출범에서 비롯된다는 것에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즉 가톨릭 농민회의 결성과 활동은 전후 농민운동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그 후 한국 농민운동을 중심적으로 이끌어 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또한 도덕성과 정통성을 결여한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유력한 중심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한국농민운동사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농민회의 활동경과를 시대구분을 통해 조명해 보는 것은 해방 후 교회와 농민운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톨릭 농민회의 활동경과에 따른 시대구분은 대체로 태동기(1964.10~1971), 성장기(1972~1980.5.18), 성년기(1980.5.18~1989) 생명운동으로서의 전환기(1990~)로 나눌 수 있다(한국 가톨릭 농민회 25주년 약사 참조). 시기별 가톨릭 농민운동을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농민회 태동기
이 시기는 5.16 군사정권에 의한 미ㆍ일 자본 차관 개발로 외국 의존 경제정책이 구체적으로 감행되기 시작하여 정치적으로 군부 독재권력이 강화되고, 경제적으로 농민ㆍ노동자의 희생이 철저하게 강요되었다. 이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태동된 가톨릭 농민회는 한국 가톨릭 노동청년회(JOC)의 농촌 청년부로 출발(1964. 10)하여 1966년 10월 한국 가톨릭 청년회(JAC)로 분리, 창립되었다. 이 당시 활동은 협업운동, 야학, 농사기술 보급, 농촌청년 계몽운동 등을 전개하는 수준이었다가 「잉여농산물 도입과 한국농업」에 대한 전국 세미나 개최(1971. 8) 등을 계기로 차츰 농업ㆍ농민문제에 대한 구조적 인식을 심화시켜 갔다.
농민회 성장기
외국 자본에 의한 수출 주도형 경제 정책과 개발 독재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노동자, 농민의 불만이 터져 민중ㆍ민주화 투쟁이 가열되어 유신 정권의 종말을 맞던 70년대, 농업의 희생을 전제로 한 근대화 개발과정에서 농촌의 상대적 피폐와 함께 농업 문제에 대한 구조적 인식이 높아 가면서 「한국 가톨릭 농민회」로 명칭을 바꾸고 (1972. 3), 자연발생적인 마을단위 경제적 일상활동을 전개하면서 농민의 투쟁의식을 행동으로 조직하여 준법, 반합법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 기간 동안 주요 활동 내용을 보면 농촌 사회의 민주화와 협동화를 목표로 마을 단위에서 민주적 이장 선출과 회의민주화, 각종 협동활동의 추진, 그리고 지역 단위에서 강제 출자 거부 및 농협 민주화 활동, 비료ㆍ농약 강매시정, 경지정리 피해보상, 부당 농지세ㆍ수세시정, 노동피해 보상 및 강제 행정시정, 전국 단위의 소작 실태조사와 문제제기(1974), 쌀 생산비 조사와 보장운동(1975~), 비료 도입 부정사건성명(1976), 농협 실태조사(1977),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1978)과 안동 농민회 사건(오원춘 사건, 1979)에 대한 전 조직의 끈질기고 치열한 투쟁 등은 모두 농민운동사의 주요 사례들이다. 그 후 유신체제의 붕괴와 함께 각 부문 운동이 전반적으로 고양된 상황에서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전국 농민대회(1980. 4), 민주헌법 및 농림법령 제정을 위한 공청회(1980. 4) 등을 통해 농민 주권의 보장,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농민회 성년기
1970년대 후반부터 농민회 안에서 일기 시작한 농민운동에 대한 성찰분위기는 80년 5.17을 겪으면서 심화되기 시작했다. 군부 독재체제에 맞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힘을 획득하지 못하는 운동의 한계, 운동의 역사성과 생명성의 부족을 뼈저리게 인식하면서 삶에 튼튼히 뿌리한 인간해방과 사회변혁의 통일적 지향이란 보다 근본적인 방향을 모색,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현장 대중성에 기초한 구체적 실천운동으로 1982년 계엄하 최초의 대중집회인 음성 부당농지세 시정대회, 구례 진양 수세 현물 납부운동(83), 임실 무안 청송 등 추곡수매운동(83), 소작세 양성화 저지운동(83), 농협 조합장 직선제 실시 백만인 서명운동(83), 소 값 피해 보상 및 외국 농축산물 수입 반대 투쟁과 소몰이 시위(85), 농가부채 해결운동(85), 농산물 수입저지 및 예속정권 타도투쟁(86), 민주헌법쟁취운동(87) 등이 수많은 농민의 지지와 참여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생명운동으로의 전환
87년 6월 항쟁 이후 고양된 대중운동의 열기는 농민대중의 운동 역량의 성숙에 따라 보다 강력한 통일적 농민운동의 출범으로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그 동안 농민운동을 주도해 오던 가톨릭 농민회를 중심으로 기독교 농민회와 독자적 군 농민회 등 군 단위 농민조직이 참여하는 전국 농민회 총연맹이 결성(1990)되었다.
이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동구사회주의권의 몰락에 따른 동ㆍ서 이념대립의 퇴색과 함께 전지구적 차원의 환경생태계의 위기에 따른 산업문명 모순의 전면화 등으로 종래와는 다른 보다 새롭고 근본적인 운동이 요청되었다. 즉 산업문명의 대안으로서의 농적(農的)문명과 농업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중시하면서 생명가치의 회복과 실현을 통해 생명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상호보완 조화 공존하는 공동체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생명공동체 운동이 그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 문명사적 요구에 따라 가톨릭 농민회는 90년 이후 「이 땅에 생명과 해방의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가톨릭 농민회는 주요 활동을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위한 각성 운동과 더불어 유기ㆍ자연농업의 실현과 도ㆍ농 직거래 및 이를 통한 생활공동체 건설로 구체화하였다.
특히 환경생태계와 조화ㆍ공존하는 유기ㆍ자연농법을 통한 안전하고 지속적인 농업의 생산과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상호 대립적이던 소비자와 생산자의 관계를 생명과 생활을 서로 의탁하는 관계로 바꾸는 도ㆍ농 공동체 운동의 실현이 이 운동의 중심과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보다 근본운동을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UR/WTO 체제로 인한 당면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안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90년대 운동의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로 주목되는 「우리밀 살리기운동」은 가톨릭 농민회의 이 같은 생명공동체운동의 구체적 사례이다.
생명공동체운동 실천
가톨릭 농민회는 1966년에 창립된 이래 지난 4반세기 동안 전체 한국 농민운동을 선도하는 집단으로 기능해 왔다.
70~80년대 국가 권력과 대결한 가톨릭 농민회의 정치, 경제적 투쟁 중심의 활동은 농업의 희생과 농촌의 붕괴를 정책의 주요 수단으로 삼는 반민중적인 군부독재 체제에서 농민의 생존권을 지키고 농촌사회를 민주화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몸부림이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폭압적 통치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가톨릭 농민회가 한국 천주교 사회운동의 중심 세력이 될 수 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톨릭 농민운동과 그 활동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믿음으로 깨어나는 농민들의 스스로, 그리고 함께 농민 자신과 시회를 누룩처럼 변화시켜 감으로써 농민 구원, 겨레 구원, 인류 구원을 지향하는 생활공동체운동이며 하느님 나라 건설운동」(정호경, 현대 한국 천주교회와 농민운동)이라는 점에서 해방 후 한국 천주교회와 농민운동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와 성과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가톨릭 농민회와 그 운동은 농민 속에서 농민의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해 온 농민의 현장 교회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 교회의 농민운동은 생명공동체운동으로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생명공동체운동은 가톨릭 농민회만의 운동이 아니라 이 시대 우리 교회,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실천운동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일용한 양식을 생산함으로써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생명의 일꾼인 농민회의 어려움은 그 어느 때 보다 심각하다. 농촌, 농업, 농민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오늘날 농민문제에 대한 인식과 이의 해결방법은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에 대한 우리 교회의 구체적인 대안이 바로 우리 농촌살리기운동이다.
이제는 도시가, 소비자가 함께 나서야 한다. 그리하여 생명의 위기, 자연생태계의 위기 속에서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손잡고 밥상살림, 농업살림을 통해 생명을 지키고 창조질서를 보전하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실천적 대안운동이고 삶의 운동이다. 도시와 농촌은 이제 공동의 운명체인 것이다. 도시의 본당 단위로 우리농, 생협 등 공동체를 결성하여 이 공동체가 농촌의 생산공동체를 하나씩 살려내는 것, 이것이 앞으로 우리 교회의 농민운동, 농민사목의 중심 과제이다.
우선 쌀 수입이 전면 개방되는 2004년까지 우리는 구체적인 대안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 운동에 가톨릭 농민회의 지난 30여 년 간의 경험과 역량에다 우리 교회의 의지가 합치되어야 한다.
도시와 농촌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얼굴을 맞대고, 손을 마주 잡은 거기에서 우리 농촌이 살아나며, 생명의 공동체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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