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글
조선왕조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많은 신도들은 천주교회를 참다운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초기의 신도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있었고, 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들의 순교는 그리스도교의 전래에 대한 자신의 확신과 충효(忠孝) 의열(義烈)등과 같은 정신적 가치를 존중해 왔던 우리 문화가 결합하여 빚어낸 현상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 교회사에 있어서 순교는 한국 교회사의 외적인 전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국화 과정을 검증하고 우리나라 정신사의 향방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도 검토해야 할 주제인 것이다.
한편 우리의 교회사를 살펴볼 때 순교자 현양은 거의 전 시대에 걸쳐서 진행되어 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 현양 사업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는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기간으로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이 기간에 있어서 전개된 순교자 현양사업을 개략적으로 검토해보고 순교자 현양사업의 과제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해방 이전 순교자 현양
우리의 교회사에서 순교자에 대한 현양이 시작된 때는 박해시대 당시부터였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묵인된 1882년 이후에 이르러 순교자를 현양하기 위한 노력이 체계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 노력의 결과로 1925년 로마에서 한국의 순교자 79명이 시복(諡福)되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식민지 조선사회에서는 순교자 현양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의 신도들은 순교자 현양운동의 과정에서 79명의 목자를「신앙의 위인」이며「조선의 영웅」이고「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용맹을 드러낸 인물」로 규정했다. 식민지 시대의 신도들도 우리나라 교회에서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의 복자들은 세계 만방에 빛나는 위업을 남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러한 신도들의 생각에 당시 조선사회에서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아니했다 하더라도 신도들에게 있어서 조선 순교 복자의 존재는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시켜주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또한 당시의 교회에서는 신앙의 실천을 다짐하기 위해서도 순교자의 모범을 따르는 자기 희생을 신도들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대의 사회교리(社會敎理)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던 당시의 교회에서는 신도들이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갈 때에도 순교자의 정신과 삶을 따르도록 강조한 바 있었다. 이렇듯 순교자들은 신도들의 종교 활동과 사회활동에 있어서 본받아야 할 전범(典範)으로 인식되었다. 순교자의 존재는 한국교회와 신도들에게 자부심의 근거를 제공해주었고, 순교 정신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요청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식민지 시대 말엽에는 순교자에 대한 정신이 당시의 시세와 야합하여 모독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순교자 현양이 자기와 타인의 구령과 교회 발전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현금(現今) 비상시국(非常時局)의 보국운동(報國運動)에도 도움이 된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 일부 지도자들은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를 권유하면서 순교자의 정신을 운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해방 당시 우리 교회에서는 순교자에 대한 민족적 자부심과 함께 순교정신을 오용했던 과오에 대한 자괴심(自愧心)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해방 이후 현양운동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민족의식이 대단히 고양되어 가고 있었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일제 하에서부터 민족적 자부심을 표현할 때 순교자의 존재를 일깨워 왔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가 순교자 현양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해방 공간에서 고양되어 있었던 민족의식에 대한 공감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교회는 보편적 신앙만을 강조하지는 아니하고 민족사의 전환기에 민족과 교회의 관계를 성찰했고, 민족과 교회의 연결고리로 순교 전통과 순교자의 존재를 제시했다.
해방 직후 교회에서 전개한 순교자 현양운동은 식민지 시대 이래로 진행되어 오던 각종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이를 활성화하는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먼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순교자 현양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는 단체의 설립을 들 수 있다. 즉, 일제 말엽에 창설을 시도하다 좌절되었던「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가 김대건 신부 순교 1백주년을 기념하여 발족되었다(1946). 한편 한국의 수도회로서는 처음으로 창설된(1932)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자신의 영성으로 영원한 도움의 성모에 대한 신심과 함께 조선 순교 복자 79위에 대한 신심을 수도회의 영성으로 제시한 바 있었다.
해방 직후에는 순교 복자에 관한 영성을 강조하고 순교자 현양을 목적으로 하여「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가 창설되었고(1946), 이에 이어서 같은 취지로「한국 순교 복자 성직수도회」(1953)도 창설되었다. 수도단체 이외에도 교회안에서는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고 펼쳐나가기 위해서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러한 단체 가운데「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의 경우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순교자 현양에 적지 아니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대철중학교, 대건고등학교, 대건신학대학 등에서 살펴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교회의 각종 기관들이 순교자의 업적을 선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이리하여 해방 50주년을 맞는 지금에 이르러서 한국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각종 단체와 기관들은 그 양적 측면에서 볼 때 괄목할 만한 증가현상을 드러내주고 있다.
현양 운동의 여러 양상
순교자에 대한 연구와 그들의 사적을 조사하려는 시도는 이미 박해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이 조사 연구의 결과 1925년에는 순교자 79명이 복자 품에 오를 수 있었다. 1880년대 이래로 지속되고 있었던 조사 연구작업의 결과로 해방 이후 1968년에는 1866년에 순교한 24명의 순교자들이 시복될 수 있었다. 이렇듯 순교자의 시복과 시성에는 학문적 연구가 전개되고 있지만 그 올바른 현양을 위해서도 본격적인 연구작업이 요청되고 있다. 이 연구작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해방 이후 교회에서는 한국 교회사 연구소를 설립했고(1964), 이어서 호남 교회사 연구소(1983), 영남 교회사 연구소(1991), 부산 교회사 연구소 등 교구 단위의 연구소들이 발족하여 순교자에 대한 집중적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이나 음악, 사진이나 미술 분야에 종사하는 신도 예술인들은 순교자의 삶과 신앙을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다. 그 창작활동의 결과로 순교자에 대한 신심이 교회 안에 더욱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또한 해방 이후 진행된 현양운동의 결과로 순교자 및 순교지에 대한 조사가 추진되었고, 순교비를 비롯한 각종의 기념물이 건립되고 있다. 그리하여 새남터를 비롯한 순교지들을 매입하여 성지로 개발하였다. 성지개발과 병행하여 순교자의 현양과 관련되는 각종 기관들도 활발하게 설립되었다. 예를 들면, 병인박해 1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1966년을 전후하여 각 교구에서는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했다. 한국 순교자를 주보로 모신 성당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증가되어 가고 있는 바, 이는 또한 순교자 현양을 위한 노력과 관계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순교자 현양운동은 순교자 현양대회와 같은 각종의 신앙대회를 통해서 대중적 신심으로 표현되었다.
순교자 현양운동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사업은 시성(諡聖)시복(諡福)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결과로 1984년에는 103명의 순교 복자들이 성인으로 선포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전주교구를 비롯해서 몇몇 교구와 단체에서는 1801년의 순교자를 위시해서 우리의 역사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해서 이를 바탕으로 한 시복 운동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맺음말
순교자에 대한 신심과 그 현양운동은 한 때 한국교회의 대표적 신심으로 자리잡기까지 하였다. 이 현상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났고, 순교자 현양운동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아니한 연구물과 작품들 그리고 각종의 기념행사와 기념물들이 남게 되었다. 103명에 이르는 한국성인이 탄생된 것도 우리 교회에서 전개해온 순교자 현양운동의 한 결과이다. 오늘날에도 더많은 순교성인과 복자를 모시기 위해서 현양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순교자 현양운동은 일대 전환기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 이르러 교회의 관심과 사업이 다양해져 갔다. 신앙인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視角)의 기준도 변화되었다. 그리하여 교회 안팎의 신도생활에서 차지하는 순교자의 모범이나 순교정신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갔다. 그러나 순교라는 역사적 사실은 그리스도교와 한국문화의 만남에서 가능했던 것이고, 우리 교회의 고유한 역사체험이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영성을 풍요롭게 하고, 한국 가톨릭 신도로서의 자기 정체성(正體性)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오늘과 내일의 한국교회에서는 순교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우선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한국 순교자에 대한 본격적인 자료집이나 연구서 한 권 없이 순교자 현양을 논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다. 순교자에 대한 성실한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그 현양사업과 새로운 시복시성을 위한 노력이 전개되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오늘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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