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선교운동
기대를 모았던 광복 50주년
광복 50주년에는 갈라진 민족사회가 다시 하나되는 통일문제에 틀림없이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 될 것으로 많은 기대가 모아졌었다. 그러나 92년 하반기부터 경색되기 시작한 남북관계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해 결국 광복 50주년도 허송세월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대북 쌀 지원 과정을 둘러싼 당국 간의 공방은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만 남겨 놓아 통일운동의 전망을 어둡게 하였고, 앞으로의 북방선교운동 전개에 있어서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교회 내적으로는 북방선교운동의 좌표가 될 지침서(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및 북선위의「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하여」)가 발표되었고,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발족되어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휴전 이후 처음으로 북한 신자들과의 공식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 등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루었다. 더구나 중국 주교단의 공식 방한이 성사되어 양국 교회 지도자들이 직접적인 대화를 갖게 되는 등 북방선교의 새 지평을 열어나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북방선교운동과 통일사목
북방선교운동은 북한 선교의 가능성 모색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는 북방 지역 전체를 복음화해 나가는 선교적 사명의 수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는 상황이므로 우선적인 관심이 북한 선교에 집중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북방선교의 궁극적 목적은 이 지역의 공통적 특성을 이루어 온 특수한 이념과 체제 그리고 그 영향으로 형성된 사고방식과 삶의 양식을 복음화하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적 무신론과 공산체제의 획일적 통치로 결과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현대의 복음선교 제19항)것이 북방선교운동의 궁극적 목표인 것이다.
더구나 갈라진 형제와 하나되어 문자 그대로「삶의 질(質) 」을 공유하여야 할 통일의 의미를 전제해 놓고 본다면 북방선교운동은 결코 통일사목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동안 주로 북한교회의 존재양식만을 문제삼아 통일된 민족사회에서의 복음적 의미 구현을 도외시해 온 사고방식은 하루 빨리 청산되어야 할 것이다.
분단과 한국교회
한반도의 분단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북방선교에 대한 사명을 숙명적인 과제로 감싸 안게 된다. 분단 이전 일제하의 한국교회는 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과 대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교황 레오 13세의「노동헌장」발표 후 교회 언론 매체들은 공산주의 선전의 허구성을 집중 공략하였다. 그러나 분단 이후에는 북한 공산정권의 출현으로 인해 재북 교회에 직접적인 탄압이 가해져 이 같은 현실적인 위협에 대처하는 긴장된 대결상황을 빚게 된다.
해방 직후 소련 군정은 표면적으로 나마 종교의 자유를 내세웠다. 때문에 당시 평양교구가「관후리 주교좌 성지 회복」과「주교좌 성당 건립」운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완전히 묵살하지는 못했는데, 1948년에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 소련군마저 철수하자 상황은 급변하기에 이른다. 1949년 5월 이후 북한교회에 본격적인 탄압이 가해지면서 함흥교구장 신 사우어 주교와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가 차례로 체포 또는 납치되고, 6ㆍ25 이전까지 북한 지역 내 모든 성직자 수도자가 희생됨으로써 이때부터 북한교회는「침묵의 교회」로 불리게 된다.
한편 남한교회는 북한교회가 공산 치하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1949년까지는 공식적인 언급을 자제하였다. 다만 헝가리 공산정권이 민첸티 추기경을 체포한데 대해 이를 항의하는 교서(1949. 4.9)를 발표함으로써 공산주의의 만행을 규탄하는 간접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그 후 북한교회의 목자들이 차례로 희생되고, 더욱이 6ㆍ25를 통하여 북한교회의 재건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게 됨에 따라 북한 공산주의를 엄중히 단죄하게 되고, 아울러 가톨릭 신자는 반공 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게 된다.
교계제도 설정과 북한교회
1962년의 한국 교계제도 설정은 북방선교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계기를 이룬다. 이 때 평양교구장 서리 캐롤 안 몬시뇰과 함흥교구장 서리 이 디모테오 몬시뇰은 재북 교구인 평양교구와 함흥교구가 새로 설정된 교계제도 안에 정식으로 포함된 것을 환영하면서『우리는 이북에 선교와 교회 활동이 새로 열릴 날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특히 안 몬시뇰은 평양교구가 17명의 신부와 60명의 수녀들이 언제든지 이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이 디모테오 몬시뇰도 그동안 함흥교구 성직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왔음을 밝히면서 재북교구를 위한 성소 개발에 지속적으로 협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지금은 김수환 추기경과 이동호 아빠스가 각각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를 맡고 있다.
교계제도 설정 후 한국교회는 북한교회를 위해 기도하는「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을 주교회의에서 공식 제정(1965. 2.17)하고, 기도문을 채택(1965. 7.3)하여 북방선교의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이 같은 사실은 한국교회가 기도운동을 통해 갈라진 형제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신앙안에 다시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 나가는 북방선교의 이념과 좌표를 공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200주년과 북방선교
북방선교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본격적인 관심은 80년대에 접어들면서 2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교회 쇄신과 민족 복음화를 대전제로 계획한 200주년 기념사업 속에 북한 선교사업 포함되고, 이를 담당하는 북한 선교부가 출범하여 중장기적인 사업계획을 마련하게 됨으로써 북방선교운동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1984년부터「북한선교」라는 회보까지 발간하였던 북한 선교부의 활동은 200주년 행사가 끝나면서 주교회의 공식 기구로 상설화되어, 이후 북방선교활동을 주도하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한편 70년대 한국 사회의 암울한 상황에서 민주화 투쟁에 깊이 관여해 온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독재 권력의 횡포가 분단 상황을 악용해온 구조적 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중시하고, 분단극복의 필요성 즉 통일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에 따라 정의구현사제단은 소속된 신부들의 자체 세미나를 통해 통일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을 점검하고 통일신학의 정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북방선교운동의 내실을 기해 나가는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바티칸 대표단 방북
휴전 이후 북한을 최초로 방문한 성직자는 고 마태오 신부이다. 북한 선교부의 해외 임원이기도 했던 고 마태오 신부는 1984년 3월에 방북하여 그 결과를 한국교회에 알리고, 이후 북한 선교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남북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제3국에 머물면서 북한 선교가 가능한 구체적 방법을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온 고 마태오 신부는 북한 관계자와의 긴밀한 접촉을 통해 고위 성직자의 방북을 주선하는 등 다각적인 접근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87년 6월 바티칸 대표단의 역사적인 방북이 성사되기에 이른다.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에 의해 북한에 천주교 신자가 실제로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때 만났던 북한 신자들은 바티칸에 초청되어 88년 4월 부활대축일에 교황을 알현하는 비화를 남기게 된다.
바티칸 대표단의 방북 이후 북한에서는 88년 6월30일자로「조선 천주교인 협회」가 결성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고, 같은 해 10월에 평양 장충성당이 건립되어 북한 교회의 위상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조선 천주교인 협회」의 결성이 한국교회나 성청과의 교계적 연관없이 이루어졌다는 점과, 결성된 후에도 교계적 연계를 뒷받침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교회는「조선 천주교인 협회」를 북한 선교의 정식 파트너로 인정하지 못하는 현실적 괴리를 아직도 메워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개신교의 KNCC가 북한의「조선 기독교도 연맹」을 파트너로 삼아 84년 이후 일관된 자세로 북한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해 온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한편 1989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44차 세계 성체대회에 참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평화의 메시지」를 통해『북한과 중국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마리아께 의탁한다』는 소망을 밝히면서 한국교회가 북방선교의 보루가 되어줄 것을 당부하게 된다. 교황은 이후에도 사도좌를 방문하는 한국 주교들에게 아시아에서의 역할, 북방선교의 사명 등을 강조하여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역할모색에 큰 기대를 표해왔다.
90년대 북방선교운동
90년대의 시대적 상황 급변은 북방선교에 있어서도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게 된다. 구소련의 붕괴와 동구 공산권의 몰락, 동서독의 통일은 공산주의 체제의 종언을 고하게 되어 북한으로서도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려는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북한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듯 개정헌법(1992. 4)에서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였을 뿐 아니라 종교의식의 거행과 종교건물 건립을 합법화하고, 종교와 관련된 용어의 사전적 정의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등 내부적인 변화를 나타내게 된다.
한국교회 역시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발맞추어 92년 3월에 개최된 춘계 주교회의에서「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명칭을「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변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60년 만에 개정되는「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에서도 북한 선교의 개념의 폭을 넓혀 민족적 화해와 일치, 평화통일에 대비한 사목 활동 등으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의 북방선교운동은 점차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다. 특히 주교회의 북선위 주관 하에 1994년 7월에 창립된 북방선교협의회(회장=김건중 신부)는 북방선교에 임하고 있는 교구나 수도단체 관계자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서로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여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길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북방선교에 있어 경쟁적인 포교활동으로 물의를 빚어온 타 종교에 귀감이 아닐 수 없다.
2천년 대희년과 북방선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새로운 천년대를 열어 나갈 교회의 비전을 제시하며, 그 관문이자 기쁨의 절정이 될 2000년을「대희년」으로 선포하였다. 이제 광복 50년을「통일희년」으로 맞이하지 못했던 한국교회는 이미 북선위에서 발표한 통일사목지침서에 제시된 것처럼 2천년을「평화와 통일의 대희년」으로 선포해야 할 것이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아마도 모든 힘을 북방선교운동에 쏟아 넣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선택이기 이전에 한국교회에 부여된 시대적 소명이다. 18세기의 한국교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21세기의 한국교회는 북방선교운동의 새로운 못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그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우선 민족사회의 통일에 대비해야 하고, 이와 더불어 통일된 민족사회에서의 교회 역량을 북방선교에 온전히 투영시켜 나갈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차질없이 준비하여 북방선교운동의 새 지평을 열어 나갈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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