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인의 신분으로 리델 신부의 복사를 맡기도 했던 하느님의 종 구한선(타대오). 누구보다 열심히 교리를 배우고 실천했다고 전해지는 그는 한국 평신도의 귀감이 되는 순교자다.
1844년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에서 태어난 구한선은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들은 후 즉시 이를 받아들여 그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성 다블뤼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10여 년 동안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며 지내다가 리델(F.Ridel, 이복명) 신부의 복사로 선택돼 거제도 전교에 동행한 적도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돼 그곳 관아로 압송됐다. 관장 앞으로 끌려나간 그는 다른 하느님의 종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문초와 형벌에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옥에 갇혀서는 주요교리를 설명한 글을 적어 관장의 부인에게 전했는데, 그의 글을 읽은 관장의 부인이 남편인 관장에게 그를 석방해주도록 요청했을 만큼 논리적이고 호소력 짙은 글을 썼다.
이 말을 들은 관장은 화가 나서 구한선을 옥에서 끌어내 혹독한 매질을 가했지만, 구한선은 “아프다”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관장이 기가 막혀 “어찌 아프다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를 않느냐”고 묻자 구한선의 대답은 이러했다.
“늙으신 어머니가 문 밖에 있을 터인데, 만일 신음소리를 내면 어머니가 이를 듣고 기절하실 것이므로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관장이 또다시 “그렇다면 어찌 천주교를 신봉했느냐”라고 질문하자 그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고 가르치므로 천주교를 신봉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모진 형벌을 당한 후 구한선은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동안 받았던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져 7일 만에 선종했다. 당시 그의 나이 22세였으며, 시신은 가족들이 고향 인근에 안장했다.
「병인치명사적」의 최 아우구스티노 회장 증언에 따르면 순교한 후 구한선의 이마에는 ‘품(品)’자 모양의 붉은 점이 찍혀있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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