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사도직 운동
한국교회는 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창설한 교회라는 점을 강조하며 세계교회에 이를 자랑하는 사례가 많다. 사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 등과 더불어 서울에서 신자공동체를 형성하고 가성직시기 등을 거쳐 중국인들과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입국해 사목과 선교에 나서기까지 그리고 엄청난 박해를 당하면서 몇 년, 혹은 몇 십 년씩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만의 힘으로 하느님의 보우하심을 청하며 신앙공동체를 이끌어 가고는 했던 것이다.
1880년대에 신교(信敎)의 자유가 이뤄진 이후의 평신도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교계 지도자들의 무사안일 태도와는 달리 조국독립을 위한 운동의 선봉에 선 안중근 의사와도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내성(內城)을 쌓는 신앙생활로 만족하는 면면을 보인 것이 아닌가 싶다.
평신도 사도직 운동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와 논의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의 일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적인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발족을 본 1968년을 계기로 현대적 의미의 평신도 사도직 운동에 접근하는 양태를 보여 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교회가 현대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노력한 1970년대와 80년대의 사도직 활동을 점검해 보면 평신도 중심이라기보다는 「성직자 중심」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1980년대 세 차례에 걸친 대형 외부 행사에 평신도들이 경비를 충당하고 조직적인 인원동원 등에 성공적으로 기여함으로써 선교에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 확실하게 살고 있는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에는 대답할 길이 막연하다.
▣ 의의
평신도들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말로써나 합당한 신자생활로써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이 되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복음 선포의 임무를 수행하는 주교와 사제들에게 협력하도록 소명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 교회법(제759조)과 교회헌장(제33항)의 정신이다. 또한 평신도들의 특별한 사명은 평신도를 통해서만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장소와 환경 속에 교회를 현존케하고 활동케하는 것이다(교회헌장 33항, 교회법 225조).
세속에 살면서 세속에 파묻혀있는 것이 평신도의 특징인 까닭에 평신도들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 정신에 불타며 누룩같이 되어 세속 안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합당한 요소가 갖추어 졌다고 주교가 판단한 조직체들은 비록 지역과 민족들의 요청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땅히 「가톨릭 운동」이라 불러야 할 것』이라고 밝힌 거룩한 공의회는 『교회의 사도적 요청을 충족시켜 주고 있는 이런 조직체들을 마음으로 권장하는 바』(평신도 교령 20) 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회가 끝나고 10년이 지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교황 바오로 6세는 그의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70항)에서『신자들의 고유한 주 임무는 교회공동체를 설립하거나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다』면서『그러한 것은 사목자의 임무가 되는 것이며 신자들의 임무는 그리스도교적이고 복음적인 모든 능력과 잠재하고 있는 가능성까지도 복음선교를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일깨워 주었다.
바로 이와 같은 연유로 1987년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20년을 지낸 교회와 세계에서의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주제로 다루게 되었고 여기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평신도들은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포도원의 일꾼들로 표현된 하느님의 백성에 속하고 있고, 『당신들도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마태 20,7)라는 이 말씀이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은 그분의 포도밭에서 어떻게 일해 왔는가?
▣ 교회사에 비친 평신도상
1. 교회 창설기와 박해시대 평신도 활동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은 「교회」라는 집을 짓는데 참으로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교회 창설기와 박해시기를 거치면서 평신도들은 투철한 신앙심과 목숨을 건 신앙생활로써 빛나는 교회사를 장식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성직자 영입을 위해 자신의 온 젊음을 다 바치다시피 한 정하상 성인을 비롯해서 그 당시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을 끔찍히도 위하고 거의 절대적인 존경을 드러내 보였다.
이처럼 초기교회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생활로써 증거하기보다 신앙 자체를 지키고 이어가기 위해서 있는 힘을 쏟아야만 했다. 초기 신자공동체인「명도회」등을 통해 단체활동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대 사회적인 활동은 엄두조차 못 낼 형편이었다.
2. 일제강점기때
신앙의 자유가 묵시적으로 용인된 때는 1884년이었고, 1899년 교민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땅의 신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탈행위로 교회도 역시 수난을 겪게 되었다.
개항이후 일제의 침략을 거치는 동안 교회는 민족을 위해 근대화운동과 반 침략운동을 전개했다. 근대화운동은 교육운동과 언론계몽운동을 통해 집중적으로 드러났는데, 이는 물론 평신도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닌, 범 교회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제시대의 평신도 활동 중 교회생활은 교리연구와 전교사업, 그리고 평신도들 간의 친교를 위한 활동 등으로 이루어졌다.
3. 해방 이후
1945년의 광복은 국토가 분단된 비극속에 38선 이북의 북한교회에는 고립과 침묵을 강요하게 되었고 남한만의 한국교회에는 크나큰 십자가의 시련을 안겨주었다.
해방 이듬해 1946년 서울교구 가톨릭 청년회가 새롭게 태어났고 서울여자 청년회도 같은 무렵 발족했다. 48년 2월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김철규 신부를 가톨릭액션 지도신부로 임명하면서 서울에 가톨릭 교육자협회와 가톨릭의 사회가 발족했고 대구교구도 일제시대 때부터 있어온 가톨릭 청년회를 활성화시켜 나가면서 대구 의과대학 가톨릭 연구회의 결성을 보았다.
49년 8월에는 전국 가톨릭 평신도 운동의 중앙기구 성격을 띤 대한 천주교 총연맹이 결성되었다.
6ㆍ25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막을 내린 196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교회 평신도 운동은 가톨릭 학생운동과 노동청년회, 그리고 레지오 마리애가 새로운 주류를 이루면서 발전해 나갔다.
1951년과 57년에 이어 67년 제 3차 세계 평신도 대회가 로마에서 열렸는데 2차와 3차 대회사이에 역사적인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고 공의회를 통해서 교황청에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일을 보는 평신도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 평협과 오늘의 평신도 활동
1. 한국평협의 결성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큰 비중으로 다룬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보인 한국 주교회의는 1968년 5월 임시총회에서 「평신도 전국 연합회」구성 비준안을 승인하고 그 책임주교로 황민성 주교를 선임했다. 같은 해 7월 대전에서「한국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중앙협의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렇게 해서 출발한 단체가 오늘의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다.
창립 당시에는 12개 교구중 11개 교구 평신도 대표와 8개 단체 대표들이 참여했으나 28년의 연륜을 헤아리는 1996년 3월 현재는 군종교구를 포함한 15개 교구 평협과 24개 단체들의 협의체로 매년 11월에 평신도 주일에 강론자료 등을 전국의 각 본당 회장에게 보내고 가톨릭대상 운영과 신뢰회복 도덕성회복 운동 등을 전개해왔다.
2. 신앙쇄신과 사회교리실천
평신도들에게 『생활의 일치는 대단히 중요하다』(평신도 그리스도인 17)고 강조한 시노드 교부들은 『일상의 직업과 사회생활 안에서 성화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요컨대 신앙과 생활이 일치해야지 따로 분리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성당에 가서만 열심히 기도하고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평신도들은 얼마만큼 하느님과 일치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고 다른 이에게 봉사하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해 오도록 생활에서 모범을 보이고 있는가?
1970년대와 80년대에 새 영세자가 크게 늘어났으나 9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고, 뿐만 아니라 기존 신자들마저도 주일의무를 다하지 않는 가운데 이른바「쉬는 신자」가 상당히 많은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이다.
그렇다면 열심히 주일의무를 다하는 평신도들 중에는 과연 얼마만큼 사도직 수행에 열의를 보이고 있는가?
다른 말로 바꾸어 지적하자면 3백만을 헤아리는 이 땅의 평신도들이 과연 얼마만큼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의 정치현실과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우리 평신도들이 기여할 부분은 참으로 많은데도 실제 상황은 부족한 면이 아주 많다.
3. 각급 공동체 평신도 회장들의 설 자리
1995년 9월 한국 교회사 연구소 제 5기 교회사 공개대학에서 최석우 소장신부는 「한국교회 회장의 위치와 역할」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한국교회는 현재 회장직이 지속되고 있고 아직도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그 지속은 명맥의 유지일 뿐 사실상 위축되어 있다』면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에서 회장직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최 신부는 또 『현실은 평범한 평신도들보다 평신도 엘리트를 더 필요로 하고 있다』고 했다. 2천년대 복음화를 준비하면서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강조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이와 같은 교회사학자의 지적은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한국 교회사에서 회장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 신부의 언급대로 그들은 선교활동의 협력자요, 선교사와 신자 사이의 중재자이며 신도단의 대표였다. 아직도 그 기능이 일부 유지되고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급증하는 신도수와 관련해서 회장 선임도 현실사목의 필요성에 의해 신중을 결여한 면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회장급 평신도들이 각자의 삶의 터전인 사회가 아닌 교회 안으로 활동영역을 국한시키는 사례를 보임으로써 『신자들의 주 임무는 교회 공동체를 설립하거나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현대의 복음선교 70)라고 한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미래의 평신도
광복 50주년을 보내고 서기 2천년대를 4년 앞두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해야 할 시점에 서있다. 물론 각 교구마다 복음화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소공동체의 활성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 평신도들이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개인 성화를 통한 공동체의 영성의 증진이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개인적인 것이지만 하느님께로 나아갈 때는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5)고 한 그 분의 새 계명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소공동체 운동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도 직장 단위의 사도직 수행에 모두가 배전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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