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한국교회가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가장 큰 유산은 무엇보다도 투철한 신심과 공동체 의식이었다. 한국교회는 오랜 기간의 학문적인 검토를 바탕으로 배양된 자발적인 신앙과 그에 따른 자주적인 노력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선교 역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사건이었다. 또한 한국교회는 근 1백년 간에 걸친 혹독한 박해를 통해 1만 명이 넘는 순교자들을 배출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과 내적 응집력을 키워 왔다. 한국교회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교회로 성장한 것은 이와 같은 유산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유형의 변화와 교회 성장
한국교회의 창립자들은 실학자와 중인계급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기존 사회질서가 급속히 해체되던 사회적 혼란상황에서 사회를 개혁하고 민중의 생활을 편하게 할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창립은 이러한 그들의 지적 노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사회의 개혁과 발전이라는 사회 지향성을 갖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 창립 직후부터 가해진 박해의 연속은 한국교회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를 계기로 가톨릭 신앙운동은 소외되고 억눌려온 민중의 종교운동으로 전환되었으며, 신앙형태는 내세주의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덧붙여, 서구 선교사들이 심어준 성속(聖俗)이원론적 신앙 역시 현세 무관의 초월적인 신앙을 강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신앙유형은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성격으로 굳어져 교회의 활동에 영향을 끼쳤다.
현실세계로부터 초월코자하는 한국교회의 신앙형태는 광복과 더불어 점차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해방정국에서의 미군정에 대한 정책자문과 정부수립 과정에의 참여, 그리고 언론을 통한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등은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참여를 증진시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계기로 나타난 새로운 흐름과 맞물리면서 보다 가속화되었다. 특히, 70년대를 전후하여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인권운동과 정의구현활동은 신자들에게 복음의 참된 의미와 함께 사회 안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을 일깨움으로써 고착화된 내세 위주의 초월주의적 신앙으로부터 벗어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성장하고 있다. 신자 수는 94년 말 현재 3백30만 명을 넘고 있으며,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기관도 근 5백 개에 달하고 있다. 또한 교회 내의 각종 단체들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신앙과 열성의 정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급속한 성장 따른 신앙유형상의 문제들
한국교회의 성장이 신자들의 결집된 신앙 결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도생활이 전혀 문제점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세 위주의 초월적 신앙형태가 크게 변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신앙과 신도생활에는 개선되어야 할 부분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며, 급속한 성장에 따른 새로운 문제들 또한 계속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가르침이나 정신과는 일치될 수 없는 종교적 심성들이 급속한 양적 성장을 통해 거의 여과되지 않은 채 계속 교회 내에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양적 성장에 따른 신자공동체의 비대화로 인해 쉽게 해소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형태와 관련하여 지적되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서는 무속적인 성향을 들 수 있다. 무속은 한국인 사고방식의 원형이고, 한국문화의 핵이다. 따라서 복음이 한국인의 심성속에 살아 움직이고 한국문화속에 육화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무속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만나야 할 것은 무속이 갖고 있는 화해와 나눔 그리고 신바람의 정신이지, 변질된 무속신앙은 아니다. 조선조에 지배계급에 의해 억눌리면서 변질되어온 저질의 무속신앙은 복음을 활성화시키기는 커녕, 그리스도 신앙 자체를 변질 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저질적 내용들이 교회내로 흘러 들어오면서 여러 가지의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들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앙의 목적을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과 봉헌보다는 개인의 현세적 이익 도모에 두는 기복신앙, 교회의 가르침과 지적 전통은 무시한 채 감각적이고 신비적인 것만 찾는 맹목적 신앙,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모두 동원하려는 혼합주의 신앙 등은 무속의 저질적 측면들과 관련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여러 기관에서 시행한 사회조사 결과들을 보면, 다행스럽게도 한국 종교인들의 기복적 성향은 가톨릭 신자들에게서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종교 신자들과의 상대적 비교 결과이지, 가톨릭 신자들이 기복적인 성향을 거의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적으로는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목적을 질병의 치유나 사업의 번창 또는 자녀의 진학 등 현세적 안녕과 복락에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속과 관련된 측면은 감각적 맹목적 성향에서도 발견된다. 신자들의 신앙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감성적인 측면과 함께 지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과 지적 전통들은 수많은 종교적 체험과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다. 이것은 신앙을 풍요롭게 만드는 비료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조사결과들을 보면, 1년에 단 한번이라도 교리교육이나 성서공부 또는 피정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비율은 아직도 50%를 밑돌고 있다. 반면, 개인의 신비체험이나 소위 「사적 계시」를 중심으로 한 신앙운동들은 기존의 교리나 신학과는 상치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출현하면서 많은 문제들을 파생시키고 있다. 또한 한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는 무속이나 민간신앙 또는 전통종교들과 관련된 신행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84년도에 한국갤럽연구소에서 실시한 사회조사에서는 가톨릭 신자들 중 24.5%가 불교에서 가르치는 윤회사상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84년도에 간행된 「2백주년 기념 사목회의 사회조사 보고서」에서는 조사 대상자 2천5백15명 중 5.2%인 1백30명이 영세 이후에도 굿을 해본 경험을 가진 것으로 밝혀졌었다. 필자가 1천93명을 대상으로 87년도에 행하였던 조사에서는 이 비율이 2.3%로 낮아졌지만, 상당수의 신자들이 가톨릭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토정비결 사주 관상 궁합 등을 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가톨릭신문사 발행, 「가톨릭 신자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참조). 이러한 「비빔밥 구조의 신앙형태」는 쉽게 다른 종교를 찾아 떠나는 부동성(浮動性)을 수반함으로써 가톨릭 신앙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전체 신자 중 약 40%가 냉담자 또는 행방불명자라는 사실은 이러한 신앙 경향과도 관련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신앙의 개인주의화 경향
한편, 한국교회의 급속한 양적 성장은 본당을 비롯한 교회 공동체의 비대화와 관료제화를 수반함으로써 바람직한 신앙형태와 신도생활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조직구조의 거대화는 개인을 조직 속에 파묻히게 하여 익명화시키는 한편, 그들의 신앙생활을 개인화ㆍ파편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신자들의 동일의식은 약화되고, 수동적 태도가 강화될 수 있다. 또한 신자들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 간의 괴리현상은 두드러지게 되고, 공동체 의식이나 공동체 생활도 약화되기 쉽다.
이러한 가능성들은 한국교회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며, 점차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에 행해졌던 여러 사회조사 결과들을 보면, 교회의 가르침과 신자들의 행위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낙태행위를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의 조사결과에서는 신자들 중 71.2%가 낙태를 지지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91년도 형사정책연구소의 조사결과에서는 가톨릭 신자들 중 낙태경험자의 비율이 불교 신자들 다음으로 많은 39.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한국 신자들의 공동체 의식은 예전에 비해 점차 낮아지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외국에서 행해진 연구결과들을 보면, 가톨릭 신자들은 타 종교의 신자들보다도 높은 사회적 결집력과 응집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들의 자살률이나 이혼율 그리고 직장에 대한 부적응 현상은 타 종교 신자들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신자들 간의 강한 결속력과 응집성은 한국교회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본당 공동체의 비대화와 사회의 개인주의화 경향에 따라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신앙생활의 양면성
지금까지 조사된 여러 연구의 결과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 신자들의 종교의식과 신앙생활은 양면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교회에서 가르치는 기본 교리들은 비교적 잘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현실생활에 접목시키지 못하는 경향,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화되기를 바라면서도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에 안주하려는 성향, 선교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선교활동에는 소극적인 성격, 성직자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크게 가지면서도 비판적 태도 또한 높은 성향, 교회의 쇄신과 토착화에 찬성하면서도 기존 전례양식에 대해 보이는 강한 집착성, 교회의 보다 많은 사회참여를 촉구하면서도 정치권력과의 갈등은 꺼리는 경향, 타 종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별로 없으면서도 그들에게 나타내는 강한 배타성 등 한국 신자들의 신앙유형이나 종교생활은 양면적 모습을 띠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과제와 해결 방안
현대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급속한 사회분화를 특징으로 하면서, 변동의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 직업이나 계층은 다양화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욕구와 관심, 이해관계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종교적 욕구를 교회가 모두 충족시켜 주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신자들의 신앙과 현실세계에서의 삶은 괴리되고, 교회의 역동성 또한 약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건전한 신앙생활과 공동체 생활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신자들의 다양한 관심이나 욕구를 교회의 정신에 접목시키거나, 또는 그들의 관심과 욕구자체를 조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신자 재교육의 강화는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풍부한 인적ㆍ지적 자산이 한국사회의 복음화를 위한 에너지로 활용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심과 이해에 따라 적합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하는 소공동체 운동의 확산과 함께, 그들의 참여 동기와 능력발휘를 억제하지 않도록 교회의 조직과 행정상의 쇄신이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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